김유섭 시인 / 붉은 비
붉은 비가 내린다. 죽은 자의 자세로 서 있는 창문 날아가 버린 콘크리트 벽 잔해들
골목을 뒤덮는 그림자마저 붉다니.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방사능 빗방울 함성 공중을 걸어 다니는 먼지 발자국
햇살과 바람의 냄새를 맡던 코가 사라진 두개골 증발해버린 피가 구름으로 회오리쳐 떠돌다가
세슘에 섞여 비로 내린다. 지나가버린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수만 년째.
붉은 비만 내리고 있다.
김유섭 시인 / 너에게 나라는 질량
너를 만날 때마다 무게의 눈금이 보고 싶지만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따라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단다 이곳이 아름다운 별이라 하더라도 확신 없이 떠돌아야 하는 궤도 함께 웃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와 백지처럼 증발해버린 너를 마주하게 되는 날들이 눈부셔 나는 자꾸만 허공 쪽으로 고개를 꺾고 허리마저 비트는 버릇이 생겼단다 가슴을 열어 펼쳐 보이는 그 짓 한 줌 부스러기 같아서 다가가 덥석 껴안았던 유리 절벽 너머, 나는 형틀에 묶인 얼굴로 내동댕이쳐져서 흘러 다닌단다 얼마나 자주 낯선 질량 속으로 나를 던져 넣어야 했던지 한치 오차도 없는 저울의 계산법으로 너는 휘파람 불며 이 광활한 세계를 잘도 오가는구나
-시집 『찬란한 봄날』 (2015, 푸른사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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