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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민경환 시인 / 억새에 기대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7.

민경환 시인 / 억새에 기대어

 

 

추억은 면역력이 짙다

계절은 이리도 무작정이다

빛살은 아린 솜방망이다

 

바람은 왜 생겨나

이리 아무것이나 흔드는가

늘 새 귀한 시간은 하찮게 스치니

찬 가슴은 일렁이는데

생을 토로하는 것은 천치나 할 짓이다

 

흔들리는 몸에 의탁하려는

저 잠자리 하, 끈질기구나

흔들림구나 살아 있음이구나

나와 같구나

 

흐르는 대로 몸 주며 사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텅빈 네 뼈대가 자랑스럽다

둥글게 이 마음 비끌어 맨다

갯가 새처럼 이러히 깃털 한 닢 떨군다

 

스산함이 아 이런,

상서로워지려는구나

흔들리는 것이로구나

초본의 정념은 그런 것이로구나

보아하니 서로 천진난만이로구나

 

 


 

 

민경환 시인 / 금강산 온정리

 

 

                                  비로봉 1638

                         채하봉 1588

                     소반덕 1482

강선대 1440

        집선봉 1351

                                             세존봉 1160

                  문필봉 337

                                        노장바위

                                 하관음봉

 

 

게르마늄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바위들을 올려다보았다

구룡폭포가 세우고 있던 흰 뼈를 보자 땀이 났었다

전날 본 교예단의 공연은 훌륭했지만 왠지 슬펐다

구역을 벗어나면 저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들과의 접촉은 그들의 법에 저촉될 것이다

맑은 눈 기름기 없는 몸 추레한 입성은 차라리

저 빼어난 산봉우리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청아한 어린 한 여급은

우리의 요청에 북쪽 노래를 몇 곡 불러줬고

나는 고마운 마음에 몇 불의 팁을 주었다

남쪽의 진보적인 시인 문창길은 나를 나무랬다

자본주의 불결함을 심으려 했다는 뜻이리라

그렇지않아 처음에 거절은 했지만 고마워하던 걸

그리고 또한 나 역시 그리 시장경제적이질 못하고

 

정작 사람들을 먼발치서만 봐야 했기에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

소녀가 팁을 주니 거절도 하는 곳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

산도 잘 알고 바다도 잘 아는

너무 많이 늙지 않은 과부도 있다면

간간히 연애편지도 보내보면서 살고 싶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고단한 근골과

헐거운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의 궁박한 식사는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음모를 꾸미게 할 거야

쉬는 날 새벽 일찍 자전거에 헌 낚싯대를 싣고

동해를 굽어보는 내 삶은 분명 주체적이리라

세습 왕조는 허약해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에

그 현장을 직접 보고 겪은 후에

지상에는 아직 없는 장편의 소설을 낳고 싶다

언젠가는 거기로 이주하리라

거기는 내가 본 최고의 땅이다

 

-시집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

 

 


 

민경환 시인

1957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2003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가 있음. 공동사화집 {나비, 봄을 짜다} 등. 2008년 제6회 애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