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환 시인 / 억새에 기대어
추억은 면역력이 짙다 계절은 이리도 무작정이다 빛살은 아린 솜방망이다
바람은 왜 생겨나 이리 아무것이나 흔드는가 늘 새 귀한 시간은 하찮게 스치니 찬 가슴은 일렁이는데 생을 토로하는 것은 천치나 할 짓이다
흔들리는 몸에 의탁하려는 저 잠자리 하, 끈질기구나 흔들림구나 살아 있음이구나 나와 같구나
흐르는 대로 몸 주며 사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텅빈 네 뼈대가 자랑스럽다 둥글게 이 마음 비끌어 맨다 갯가 새처럼 이러히 깃털 한 닢 떨군다
스산함이 아 이런, 상서로워지려는구나 흔들리는 것이로구나 초본의 정념은 그런 것이로구나 보아하니 서로 천진난만이로구나
민경환 시인 / 금강산 온정리
비로봉 1638 채하봉 1588 소반덕 1482 강선대 1440 집선봉 1351 세존봉 1160 문필봉 337 노장바위 하관음봉
게르마늄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바위들을 올려다보았다 구룡폭포가 세우고 있던 흰 뼈를 보자 땀이 났었다 전날 본 교예단의 공연은 훌륭했지만 왠지 슬펐다 구역을 벗어나면 저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들과의 접촉은 그들의 법에 저촉될 것이다 맑은 눈 기름기 없는 몸 추레한 입성은 차라리 저 빼어난 산봉우리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청아한 어린 한 여급은 우리의 요청에 북쪽 노래를 몇 곡 불러줬고 나는 고마운 마음에 몇 불의 팁을 주었다 남쪽의 진보적인 시인 문창길은 나를 나무랬다 자본주의 불결함을 심으려 했다는 뜻이리라 그렇지않아 처음에 거절은 했지만 고마워하던 걸 그리고 또한 나 역시 그리 시장경제적이질 못하고
정작 사람들을 먼발치서만 봐야 했기에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 소녀가 팁을 주니 거절도 하는 곳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 산도 잘 알고 바다도 잘 아는 너무 많이 늙지 않은 과부도 있다면 간간히 연애편지도 보내보면서 살고 싶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고단한 근골과 헐거운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의 궁박한 식사는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음모를 꾸미게 할 거야 쉬는 날 새벽 일찍 자전거에 헌 낚싯대를 싣고 동해를 굽어보는 내 삶은 분명 주체적이리라 세습 왕조는 허약해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에 그 현장을 직접 보고 겪은 후에 지상에는 아직 없는 장편의 소설을 낳고 싶다 언젠가는 거기로 이주하리라 거기는 내가 본 최고의 땅이다
-시집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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