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시인 / 동경
해가 비치는 언덕을 따라 정릉에 가네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낙서 금지 사랑해 금옥아 모든 금지의 담벼락을 넘어 세상 꽃이란 꽃들은 목숨을 다하여 피고
마당에 둘러앉아 뽀얀 빛깔의 술을 따를 때 해시시 해시시 누군가 수줍게 웃었네
울고 싶어도 울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아직 많아 누군가의 어깨는 흐느끼고
봄바람 속, 때 묻은 세간들이 수런거리네
바지랑대는 직립을 향하여 빨랫줄은 평행을 향하여 우리 둘러앉은 방부목 평상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를 향하여
먼지는 먼지를 향하여 최선을 다하는 봄날
화투패를 돌리듯 술잔을 돌린다 내년 봄엔 오키나와에 갑시다 목백일홍 필 무렵엔 우리 노고단에 오릅시다
도원결의가 별건가 이런 게 도원결의지
취한 건 우리가 아니라 난분분하던 꽃잎들 애달픈 당신의 심장을 볕에 내어 말리고 싶다 여기는 한낮
야속한 약속들이 뭉게뭉게
쓸쓸하여도 사려 깊은 구름들이 둥글게 둥글게
김은경 시인 / 다르질링에서 쓰는 엽서
이것은 그러니까 이번 생애 가장 멀리 띄우는 소식 하관이 긴 벵골 출신의 우체국 직원은 한 달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약속할 수 있다는 것도 약속할 게 없다는 것도 죄다 유한한 사람의 일
엽서 속 칸첸중가엔 허기진 밥물 같은 안개가 고여 있다 이국의 언어를 주소란에 적어 넣는다 당신과 분배할 빚이 사라져서 지난 이별은 고통스러웠어, 붉은 꽃과 붉은 불과 무채색의 기도 시바*를 부르며 푸자** 행렬 속에서 생을 다하는 문맹은 선량할 거야
구애에 실패한 독수리들이 회오리바람을 몰고 날아오른다 유서 없는 죽음들이 아침저녁으로 만개한다
엽서 한 장에 다 쓰지 못할 말도 엽서 한 장에 다 쓸 수 있는 말도 내게는 없어서
나마스테, 당신의 이름만 쓰기로 한다
우체국 문을 나서면 기차역 기차역을 지나면 푸른 차밭 차밭을 지나면, 칸첸중가를 지나면, 오늘 밤을 지나면, 내일과 글피를 지나면……
이상하고 슬픈 돌림노래는 누가 부르는 것인지
검푸른 삼나무 숲을 달리고 달려도 가장 느린 자전거를 타고 나온 여행자처럼 이번 생 우리는 내내 별거 중이다
어떤 편지는 후생에야 닿고
어떤 이는 매일밤 유실(流?)되는 꿈을 꿀 것이다
*시바(Siva) : 파괴자인 동시에 재건자인 힌두교의 신(神). **푸자(Puja) : 힌두교의 제사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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