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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가을 시인 / 거울의 레트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8.

정가을 시인 / 거울의 레트로

 

 

뭐랄까 태어났는데

게임 바탕화면 속

수만 번 긴 칼에 휘둘려

검은 숲에 던져졌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자고 있는 캐릭터

뭐랄까 태어났는데

중세의 왕국

수백만 번 창에 휘둘려

핏빛 강물에 던져졌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강물에 던져지는 캐릭터

뭐랄까 태어났는데

현대의 옥상

수천만 번 캘빈 총에 휘둘려

푸른 옥탑방에 쌓였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석탄처럼 쌓여가는 캐릭터

햇살이 손등에 한 줄로 꽂히고 있다

처음의 작은 점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 에서

 

 


 

 

정가을 시인 / 아는 얘기

 

 

 물 한 컵 돌고 그다음 빨간 글씨 쓰인 투명 컵에 술이 채워진다 사람 수만큼 젓가락이 놓였다 오늘 조금만 마실 거야 내일 너무 힘들면 안 되니까 세 칸 기본 안주 접시 놓이자마자 잔을 들었다 비워진다 내부 민원이 더 힘든 거 알지 우리 멤버가 지금 너무 좋으니까 그리 알고, 채워진다 틈틈이 바람 좀 쐬어가며 일해 계속 앉아 있는 게 몸에 안 좋은 거 알지, 벙벙하게 채워지고 못 들을 척 비워지고 어제 그 할머니 어떻게 됐어 양로원에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밥을 해 먹을 수 있지만 그게 안 될 때 가고 싶다고 혼자서 혼자로 살 수 없을 때 갈 수 있는 곳이 요양원이에요 양로원에는 지금 가야 하고요 이야기하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웃다가 한숨짓고 이야기하고 다른 걸 원하는 게 아니라고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 에서

 

 


 

정가을 시인

대구에서 출생. 2018년 《애지》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전문지 『사이펀』 편집장. 「열시사십오분 창작랩」, 「사이펀 시인들」 회원으로 활동. 시집 『바질토마토』 『빌어먹을 다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