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송 시인 / 밀물
세상에서 가장 빠른 뱀을 만났다 밀물, 그 뱀에 쫓기어 여기까지 왔다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게, 꼭 어려운 문제에 두는 건 아닐 것이다 뭘 모르고 도망 다니는 일들이 그래서 살맛 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내게 왔다가 비틀거리며 떠나갔거나 네게 갔다가 휘청거리며 돌아왔거나 그런 단순한 반복들, 싫증 부릴 여지도 없다 그게 그저 그렇게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은 오로지 논 가운데 무덤 속 부장품처럼 이 단순함을 끌어안고 물은 그저 흐를 뿐인데, 물에 쫓긴다 난 또 얼마나 쫓고 쫓겨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뱀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도망자거나 가장 느린 추적자거나 나도 그런 뱀이다.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2022.06.24.
장대송 시인 / 다시 태어나면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
애비는 축축한 불빛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다니는 불빛이다 그는 생전 듣지 못한 곡을 늘 부른다 어디서 그 노래들을 배우는 것일까 애비가 부르는 노래가 흔들린다 애비의 몸도 비틀댄다
몸이 흔들린다 정신이 흔들린다 흔들리다 일치되는 순간 나는 작물이다 어디에서 나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애비는 나를 들고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시집 <섬들이 놀다>
장대송 시인 / 그래서 뭐라고?
두 발 달린 짐승에게 정붙이지 말라고? 체온이 떨어진다고? 두 발 달린 짐승에게 몸대지 말라고? 상처투성이 된다고?
-시집 <섬들이 놀다>
장대송 시인 / 휴일
자장면 그릇을 씌운 비닐랩이 팽팽하다 수평선이다 단무지 그릇은 수평선이 답답하다 그릇 속의 단무지는 행복하다 랩 한가운데에 면도칼을 댄다
11층 아파트 빗소리를 듣기 위해 베란다에 가져다놓은 양철판 위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방송을 마친 모니터에서 빗소리가 난다 빗방울들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모니터에 면도칼을 댄다
-시집 <섬들이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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