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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남궁선 시인 / 협탁이 있는 트윈 베드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8.

남궁선 시인 / 협탁이 있는 트윈 베드룸

 

 

휴게소에 가면 비우는 것이 있지

널 이해하고 싶은 편견

한낮 텅 빈 여행지의 숙소를 사랑해

 

영문판 불경과 성경이

협탁 위에

 

상처받았다고 믿는 습관은

위와 폐에 나쁘고

미의식이 결여된 제복이라지

 

비어있는 가구와 서랍

서랍을 열어보는 사람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 사람

서랍이란 말이 쓸쓸한 사람

 

너와 나 사이에

협탁

이란 말

 

-시집 ‘당신의 정거장은 내가 손을 흔드는 세계’ 중에서

 

 


 

 

남궁선 시인 /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

 

 

주름 접기

 

 우리는 창의 가운데서 등을 맞대고 흰 커튼에 주름을 접으며 천천히 전진하였다 커튼에 우아한 주름이 겹겹이 쌓여갈 때 창은 여전히 넓고 창백한 입술이 얇아져 갔다

 

동작대교 아래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강변 공원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다 그대는 왈츠를 추다 마주쳤다왈츠가 멈추고 노래가 끊겼다 한밤의 어둠을 껴안은 그대의 두 눈이 흔들리고동작대교 난간에 매달린 분홍 초록 보라의 불빛이 그대의 눈에 맺혔다

 

 그댄 너무 많은 빛깔의 눈을 가진 자

 

리본

 

 환자복을 입은 창문이여 우리는 병적으로 창을 닦고 병적으로 리본을 부풀렸지대청소의 날 만족할 줄 모르는 투명한 감독관의 안경알이여, 손에 들린 걸레는 허밍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첫눈

 

 화단의 젖은 흙이 단내를 풍길 때

 

 눈이 온다 왈츠를 추는 그대의 오리털 파카 위로 추리닝 바지 아래로 속눈썹을 스치고 눈이 온다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어지는 눈이

 

 


 

 

남궁선 시인 / 건기 시대

 

 

건기의 밤엔 목마른 나뭇잎이 나를 강간하러 온다

 

커다란 낙엽이 짐승의 울음 되어 지붕을 덮을 때

 

나무의 뼈를 핥는 달

 

낙엽과 대결하는 이 구도는

 

오래 전,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공포를 계산하던 나의 눈동자

 

두려운 내 두 귀가 숲속에 날카로운 길을 만들었다

 

나는 바싹 마른 대지에 이빨을 박고 이 밤을 흡혈한다

 

고목의 발목 위로 나뭇잎이 수북이 쌓인다

 

지상의 마지막 물방울을 삼켜버린 구름이 조금씩 계절을 옮겨가고

 

타오르는 불의 시간,

 

나는 밤을 지새운 세밀화가처럼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나의 눈을 쉬게 한다

 

 


 

남궁선 시인

1973년 인천 강화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11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정거장은 내가 손을 흔드는 세계』(천년의시작, 2013)가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