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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산하 시인 / 불새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8.

박산하 시인 / 불새가

 

 

사과나무를 태운다

사과를 그리며 난롯불을 지핀다

갈라진 틈새로 선홍 불이 파고든다

몸 부풀고 금이간다

수액을 짠다

사과를 갉아 먹던 새

둥치를 태우자 불새 한 마리 튀어나온다

홰치는 새

부리가 빨갛다

날개도 발가락도 붉은 몸

간혹 푸른 깃털이 얼비치기도 한다

맘껏 날갯짓이다

사과가 되지 못한 몸

파도를 탄다

겹겹 파도

파동은 파동을 밀고

문이란 문 다 열고

홰를 치던 불새,

새가 나온 사과나무의 몸은

결이 잘 펴진 흑장미 한 송이 피어나고

원 없이 타던 몸

불새가 되었다

장미가 되었다가

 

 


 

 

박산하 시인 / 다례茶禮를 올리는 밤의 높이

 

 

차 한 잔은

저쪽 강을 건넌 사람에게 건네는 연예편지다

 

삼십팔억 년 된 물을 끓여

사십억 년 된 흙을 구운 잔에

오천 년 된 찻잎을 우린다

 

차 한잔 합시다 하면

봄날, 산수유꽃 터지듯, 노란 물들 듯

종달새, 내 어깨 위를 치고 날아가듯

무거운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건너온다

몸 풀리는 소리, 가뿐하다

 

손바닥 안의 호수

굽어진 표정이 남아서

막힌 말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연둣빛으로 물든 내장

화한 박하가 밀고 온다

 

-시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천년의시작, 2019년,

 

 


 

박산하 시인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 졸업. 2014년 《서정과 현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가 있음. 제5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수상. 2014 『서정과 현실』 신인작품상을 수상. 울산문인협회, 울산시인협회, <詩木>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