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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유선 시인 / 스트라이프 원피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8.

이유선 시인 / 스트라이프 원피스

 

 

 나는 스트라이프 원피스 갈등을 피하는 밋밋한 구조 위와 아래 하나가 된 치마 안에 감춘 이야기 지퍼를 마저 올리면

 

 문득 닫히는 등

 갇힌 몸이 듣는 상처

 

 누군가 한입 베어 문 자두가 눈물처럼 맨홀 속으로 굴러 들어간다 가득 차오르는 빗물과 함께 뭉개지는 사건

 

 축축한 바닥은

 시큼함은 도무지 숨길 수 없어

 

 잘 익은 거짓말을 쌓아올리면 질문은 다시 쏟아진다 그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습니까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일을 멈추었을 때

 별의 궤적은 흩어지고 밤의 이끼는 바닥에서 무성하게 자라나 방향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나의 부끄러운 사마리아 여인은 나타나 자신의 일곱 번째 호칭을 부른다 나는 스트라이프 원피스 엉망진창이 된 계절들을 한꺼번에 갈아입는

 

 혈흔에서 나의 무딘 여름밤은 태어나고 자두는 나무 꼭대기에서 열려 가장 낮은 바닥으로 남는 건 누군가 떨어져 죽는 장면과 순간적인 비명

 

 정오마다 맨홀의 물을 길어 올리며 사마리아 여인은 나의 그림자를 벗고 추락하는 자세로 춤을 예언은 예언으로 이야기는 이야기로 손은 손으로

 

 거꾸로 뒤집어지는 치마

 뒤늦게 성소를 찾는 사마리아 여인

 

 맨홀 뚜껑을 닫으면 어둠은 끈적거려 이름의 기원은 필요 없어지고 그때 이미 나는 누구였습니까 문득 삼킨 진실이 배꼽에 다다랐을 때 찡그린 얼굴을 두들기는 빗방울

 

 


 

 

이유선 시인 / 고장 난 버튼을 누르고 싶어 파리공원에 갔다

 

 

 나는 파리공원을 걸었다 나무들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고 내 키보다 낮은 개선문을 돌아서면 에펠탑은 나타났고 첨탑을 비추는 조명이 더 가짜 같았다

 

 벤치에 앉아 너를 생각했다 너와의 대화 속에 있었던 나의 진심들을 골랐는데 그런 것이 정말 있기는 있었던가 옆에 놓인 자판기는 오늘도 웅웅거렸다 멋지다 게토레이 코코팜 트레비 아이시스 레쓰비 사이다를 보여주는 자세와 동전의 개수만큼만 내어주는 태도

 

 그러나 고장 난 버튼은 언제나 있었다 난 비밀이 많아 그래서 거짓도 많아 이런 나라도 이해해 지우고 싶어 다시 돌리고 싶어 속이고 속았던 나의 지난 사랑을 다시 한 번 잊고 싶어 눈물이 많아서*, 그곳을 억지로 누를 때마다 나는 넘쳐서 거꾸로 너에게 쏟아졌는데

 

 진짜는 다른 곳에 잘 있다

 

 슬픔도 탄산처럼 즐거워 후렴처럼 빤해서 나는 너를 거기 그대로 두고 걸어갔고 파리공원은 아직도 파리공원이었고 믿을 만한 마음이란 하나도 없었는데 사실 전기가 없었다면 자판기의 형식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이젠 정말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너와 내가 우리였던 적이 있기는 있었던 건지 몰라서 벤치에 앉아 너를 생각하던 나는 일어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너보다 작아지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등을 밀었다 쿵, 하고 내게서 무언가가 떨어졌고

 

 아무도 없었다 맞은편에 놓여 있는 스트라빈스키 분수대는 동절기라서 작동하지 않았고 죽었어?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아주 조그맣게 들렸는데 파리에 가지 않아도 지금이 딱 좋아 나는

 

*수지의 〈눈물이 많아서〉 노래 가사 중 일부이다. 나는 너와 잘 지내고 싶어서 반말로 고쳐 부르고는 했었는데, 너는 내가 그럴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선 시인(서울)

1982년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2019년 《시인동네》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