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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순 시인 / 사고, 그 다음에 오는 것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9.

<제2회 아라작품상 수상작>

권순 시인 / 사고, 그 다음에 오는 것들

 

 

그날, 큰물이 졌다

허둥대는 아버지의 눈에서 굵은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빗방울처럼 튀어올라

찰찰거리는 도랑을 가로질러 둑으로 달려갔다

 

붉은 물살이 거세게 흘러넘치는 그곳에

물살에 섞인 돼지들이 버둥거렸다

급류에 휘말린 것들의 아우성이 끓어오르고

절구와 찬장이 곤두박질치고

싸리비와 지게가 떠내려 왔다

물살은 자꾸 무언가를 게워냈다

물살이 제 몸을 뒤집을 때마다

우리는 마른침을 꼴깍거리며 다음을 기다렸다

 

갯버들에 잠시 결을 고르던 물살이

거품을 집어 삼키는 사이에

놋요강이 떠오르고

누런 옷가지와 이불이 떠오르고

떠오르는 것들이 출렁이는 사이에

자잘하고 낯익은 일상이 흘러갔다

 

물살이 쓸려 가는 그곳으로

낯익은 것들이 사라졌다

그 다음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았다

 

 


 

 

권순 시인 / 잠자는 등

 

 

잠자는 등이 비를 맞는다

버스터미널 소음들이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버즘나무가 젖은 보따리를 둘러메고

강으로 달아나는 줄도 모르고

등 너머 고요에 물든 듯 혼자만 적막하다

그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

 

잠자는 등이 웃는다

노을빛에 한쪽 눈을 지지고 떠났던 첫 여자가

아이를 업고 돌아오는 줄도 모르고

버즘나무 성화에 몸 열었던 앞강이

다투어 짐을 싸는 줄도 모르고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듯 웃는다

누군가 핏발 선 눈으로 웃는 등을 핥고 있다

붉은 그 눈은 웃는 등에 속해 있는 것인가

등 너머 아득함에 속해 있는 것인가

 

잠자는 등에 마지막 비가 내린다

속옷까지 젖은 버스가 멈춘다

소음들이 마지막 비를 통과한다

돌조개 무덤을 지나온 빗방울이 강으로 뛰어든다

선잠 깨어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것들이

부지런히 자리를 뜬다

 

 


 

 

권순 시인 / 발자국이 자란다

 

 

눈밭에 발자국이 난무하다

고만고만한 걸음들이 눈밭에서 자라고 지워지고

 

갱지에 글을 쓰듯 또박또박 옮긴 걸음, 거만하게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간 걸음, 성질머리 급해서 앞꿈치가 깊게 찍힌 걸음, 날렵하게 뛰어간,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지나간, 흔적을 남기기 싫은 듯 슬쩍 스친 걸음이 서로 다투어 걷는다 걸음은 나란히 가는 것 같지만 늘 다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국에 바람이 담긴다

 

걸음이 걸음을 기다린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다른 걸음의 몸을 받는다 다른 걸음을 생김새대로 받아주던 어떤 걸음은 그지없는 눈밭이 되고

 

너무 일찍 집을 나선 어떤 걸음은 섞이지도 자라지도 못해 그 자리가 제 감옥인데

 

언 발은 왜 비굴할까

비굴한 걸음이 숨을 곳을 찾는다

 

앞꿈치와 뒤꿈치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걸음이 앞서 간다 얌전하게 떼어놓은 수제비 같은 말랑한 걸음이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걸음이다

 

어떤 삶이 지나간 자리일까

 

바람이 뒷덜미를 당긴다

거기,흩어져 구불거리는 내 걸음이

어지럽다

 

 


 

 

권순 시인 / 칼국수와 사이다

 

 

갯가에 늘어선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 사이에

백합칼국수가 있다

 

지금은 점심과 저녁 사이다

민박집과 편의점 사이를 지나 앳된 커플이 들어온다

 

커플은 사이다를 먼저 마신다 여자애는 마틸다를 닮았다

둘의 목 넘김이 격렬하다

사이다를 마시는 여자애를 보다가

국수 가락이 그 애 입으로 들어가는 사이를 보다가

사이사이에 밭은기침을 하는

아무도 닮지 않은 남자애를 보다가

그 사이에 또 사이다를 마시는

마틸다를 보는 사이, 네이버에는

어린 여자애 시신이 버려져 있다

 

죽은 아이 얼굴이 네이버 액정에 떠오르는 사이에

먼 사막에선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간다

 

백합 조개 통통한 살이 혀에 말려 넘어가는 사이

해거름이 붉다

 

붉은 빛이 빗살처럼 퍼지는 사이에

눈살을 찌푸린 우리는 국수를 삼킨다

국수 가락이 넘어가는 사이에

마틸다는 사이다를 마신다

 

 


 

 

권순 시인 / 풀이 달아나다

 

 

 귀가 아닌 코끝에 끼쳐오는 소리가 있다 자잘한 화분에 담긴 키 작은 식물들이 잘 보살필 줄 모르는 주인을 만나 고생이다 시들해진 잎 모양새가 더위 먹은 사람 몰골이다 그 꼴을 보고 있다가 가위를 들었다 누런 잎과 시든 가지를 자른다 잎을 자를 때 마다 가지가 잘려나갈 때 마다 생살 찢기는 아픔에 몸을 떠는지 비릿한 신음이 난다 다른 화분 누런 잎사귀도 마저 잘라야 하는데 다급히 퍼지는 비릿함 때문에 늘어졌던 신경이 곤두선다 그 울부짖음이 폐부에 박힌다 날것에서 오는 비릿한 냄새는 곰취향 같기도 하고 은어향 같기도 하고 말 오줌이 그것들과 뒤섞인 냄새 같기도 하다 아무튼 위험에 빠진 식물이 동무들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것이란다 고막을 울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숨 끊어지는 아픔에 이제 귀가 아닌 코를 기울여야겠다 저기 풀이 또 달아난다

 

 


 

권순 시인

경북 봉화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 시동인 <현상>과 <막비> 동인으로 활동 중.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