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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경 시인 / 작약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0.

이은경 시인 / 작약

 

 

불 꺼진 방의

내려앉은 침묵 속으로

 

길쭉길쭉하게 자란 어둠의 뼈들이

오래 비어 있는 꽃병의 주둥이에 꽉꽉 차오른다

 

잎이 지는 유리창에

누워 뒤척이던 까칠한 말들이

빈 방바닥에 마른 꽃잎들을 뿌려 놓는다

 

도망치듯 숨어들었던

부푼 책들 속에서는 뿌리도 없이

탐스런 작약이 피기도 했는데

 

유리창은 자꾸 바람을 불러

슬픈 노래들을 끌어 모으고

 

물기 없는 뿌리들은 흩어진 말의

주검들을 느슨한 벽면에 휘감아 올린다

 

언젠가

봄의 창문 밖으로 꽃이 피고 비가 내리고 했던가

 

生의 어느 한 모서리에

전하지 못한 말의 저녁을 가두어 놓고

 

자신의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는 밤

 

여기, 한 그루 작약이 마른침을 삼킨다

 

<시로 여는 세상>2007 여름호

 

 


 

이은경 시인

196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2003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