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 시인 /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
돼지 머릴 삶는 가마솥 위로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목소리는 낡은 옛집이 물에 잠기듯 어둑어둑하고 푹 고은 살과 뼈는 무릎처럼 허물어져 어둑어둑 잠기고 팔팔 끓는 이마를 짚어보다가도 이내 또 어둑어둑해지는 쇠죽을 쑤는 무쇠솥과 붉은 아궁이를 안으며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감나무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별 하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밤새 푹푹 잠기던 길은 마을 하나를 재우고서야 아득해지는 이 별에서 이별을 생각하는 당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아침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하나가 어둑어둑 굴러 나온다 오늘따라 아랫목도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군불을 더 넣으신다)
-『서울신문/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2022.04.29. -
정훈교 시인 /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가난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그림자 가득한 검멀레 해변을 오래 걸었어, 난 혼자였지만 씩씩했고, 그렇지만 우도의 저녁은 외로웠어 그렇다고 바다를 탓하거나, 노을을 탓하지 않았지 오히려 그 밤에도 새벽은 어둠보다 아침에 가까웠어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이른 아침이 와도, 당신의 이름을 지우는 일은 여전히 외로워! 어제처럼, 후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면 후후후 바람이 불 것 같은 가난한 이름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2020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광식 시인 / 연어 귀향 외 1편 (0) | 2023.02.20 |
---|---|
김지율 시인 / 연두 외 1편 (0) | 2023.02.20 |
최지원 시인 / 설원의 나무 외 1편 (0) | 2023.02.20 |
이은경 시인 / 작약 (0) | 2023.02.20 |
장승진 시인(홍천) / 꽃마리 외 1편 (0) | 202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