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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훈교 시인 /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0.

정훈교 시인 /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

 

 

돼지 머릴 삶는 가마솥 위로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목소리는 낡은 옛집이 물에 잠기듯 어둑어둑하고

푹 고은 살과 뼈는 무릎처럼 허물어져 어둑어둑 잠기고

팔팔 끓는 이마를 짚어보다가도 이내 또 어둑어둑해지는

쇠죽을 쑤는 무쇠솥과 붉은 아궁이를 안으며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감나무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별 하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밤새 푹푹 잠기던 길은 마을 하나를 재우고서야 아득해지는

이 별에서 이별을 생각하는 당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아침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하나가 어둑어둑 굴러 나온다

오늘따라 아랫목도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군불을 더 넣으신다)

 

-『서울신문/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2022.04.29. -

 

 


 

 

정훈교 시인 /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가난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그림자 가득한 검멀레 해변을 오래 걸었어, 난 혼자였지만

씩씩했고, 그렇지만

우도의 저녁은 외로웠어

그렇다고 바다를 탓하거나, 노을을 탓하지 않았지 오히려

그 밤에도 새벽은 어둠보다 아침에 가까웠어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이른 아침이 와도, 당신의 이름을 지우는 일은 여전히 외로워!

어제처럼, 후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면 후후후 바람이 불 것 같은

가난한 이름

​​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2020

 

 


 

정훈교 시인

1977년 경북 영주 출생.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석사) 졸업.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또 하나의 입술』 『어떤 이름은 너무 아프다』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가 있음. ‘젊은 시인들’ 동인. 현재 시집서점 겸 출판사 시인보호구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