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 시인 / 연두
그늘과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만질 수 없다
연두가 연두를 바라봅니다 연두 잎이 연두 잎을 들춥니다 연두의 이름으로 연두의 질서로 나아갑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에서 수직으로 그늘이 지나가고 적막이 지나갑니다 텅 빈 소리가 소리를 흡수합니다 텅 빈 마음이 마음을 부릅니다 떠나는 마음에는 장면이 없고 새가 없습니다 풀밭이 끝나고 연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늘이 그림자를 옮기듯 그림자가 불안을 옮깁니다 햇살과 편견으로부터 떨어진 단추와 기도로부터 그림자와 구름 흰 그늘이 그림자를 밀어냅니다 굴욕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해석되지 않는 세계는 희미하고 공간은 좁습니다 천막은 천막을 위해 연두는 연두를 위해 흔들립니다 얼굴을 지우고 목소리를 지웁니다 배경이 없고 이름이 없습니다 슬픈 목소리는 남고 차가운 귀는 사라졌습니다 한 행과 한 행 사이 잠시 붉고 한 행과 한 행 사이 잠시 멈춥니다 생각을 멈추면 마음이 표정으로 변하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에는 새로운 연습이 필요합니다 흰 그늘 속의 푸른 적막처럼요 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파란, 2022) 수록
김지율 시인 / 나는 바닥부터 먼저 시작했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돌이 날아오고 한쪽에서는 싸움이 이어졌다
사거리에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규칙이 누군가의 목적으로 바뀔 때
내가 사랑했던 밤들을 시행착오라 해도
불길 뒤에서 헌 옷 수거함까지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과 벽제 화장터로 가는 길에서
어떤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이미 지나온 곳에서
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벽이 시작되는 어딘가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다만 부족한 명분과 바깥의 기분
누군가를 마중 나가던 밤하늘의 별은 아름다웠고 크고 둥근 레몬을 기적이라 했지만
나에게 던져진 필살의 쾌도는 소리 없이 명중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또 누군가의 등에 꽂히겠지만 나는 그 바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파란,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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