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진 시인(장흥) / 춘분
낮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방치됐던 묵정밭에서 잔돌멩이들이 눈을 뜹니다 볕 좋은 하루가 노릇노릇 익어갑니다 너무 익은 부분을 바람이 식혀줍니다 그 가운데 당신이 놓아둔 삽 한 자루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납니다 돌아온 시력을 다시 끌어당깁니다 참새가 밭두둑에 앉아 목을 빼더니 무리를 찾아 떠나갑니다 바람이 참새를 힘껏 밀어줍니다 기억의 저편, 우두커니 선 나무에 초록 기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잎이 자라는 대로 운명의 손금도 알 수 있겠지요 당신이 지펴 논 봄기운이 초록 불꽃으로 타올라 세상을 달굽니다 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이 불꽃의 일렁임 때문이겠지요 이제 바람과 불꽃에 음습한 나를 말려야 할 때입니다
-시집 <통신두절> 2009. 문학의전당
장승진 시인(장흥) / 고독
마음만으로는 채울 수 없어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했다가 비만에 걸린 적 있는 내 안의 빈 독
장승진 시인(장흥) /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사람들이 밀집한 숲 속에 내 비록 나무 한 그루로 서 있지만 나의 본질은 구름이라네 주변의 물방울들 모두 불러들여 가슴과 머리를 채우고 보면 어느새 나는 흐릿해진 구름 그들이 소용없다 버린 오폐수들이 내 아픔의 근간을 이루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날 선 진실이 되어 내 구름의 실체를 만들어 뭉게뭉게 피어나던 끝에 불편한 밤 폭우가 되어 내린다네 텅 빈 마음은 다시금 숲 속 나무들의 습기로 채워지고 그 지독하게 음습한 기운 때문에 나는 뿌리를 벗어던지고 구름처럼 빙빙 떠돌아다닌다네 비를 내려 구름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네 한결 맑아진 공기가 잠시라도 기분을 채운다면 더욱 좋겠네 물방울이 닿으면 쪼르륵 흘려버리는 젖지 않는 잎을 지닌 나무숲 속에서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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