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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승진 시인(장흥) / 춘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0.

장승진 시인(장흥) / 춘분

 

 

낮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방치됐던 묵정밭에서

잔돌멩이들이 눈을 뜹니다

볕 좋은 하루가 노릇노릇 익어갑니다

너무 익은 부분을 바람이 식혀줍니다

그 가운데 당신이 놓아둔 삽 한 자루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납니다

돌아온 시력을 다시 끌어당깁니다

참새가 밭두둑에 앉아 목을 빼더니

무리를 찾아 떠나갑니다

바람이 참새를 힘껏 밀어줍니다

기억의 저편, 우두커니 선 나무에

초록 기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잎이 자라는 대로

운명의 손금도 알 수 있겠지요

당신이 지펴 논 봄기운이

초록 불꽃으로 타올라 세상을 달굽니다

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이 불꽃의 일렁임 때문이겠지요

이제 바람과 불꽃에

음습한 나를 말려야 할 때입니다

 

-시집 <통신두절> 2009. 문학의전당

 

 


 

 

장승진 시인(장흥) / 고독

 

 

마음만으로는 채울 수 없어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했다가

비만에 걸린 적 있는

내 안의 빈 독

 

 


 

 

장승진 시인(장흥) /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사람들이 밀집한 숲 속에

내 비록 나무 한 그루로 서 있지만

나의 본질은 구름이라네

주변의 물방울들 모두 불러들여

가슴과 머리를 채우고 보면

어느새 나는 흐릿해진 구름

그들이 소용없다 버린 오폐수들이

내 아픔의 근간을 이루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날 선 진실이 되어

내 구름의 실체를 만들어

뭉게뭉게 피어나던 끝에

불편한 밤 폭우가 되어 내린다네

텅 빈 마음은 다시금

숲 속 나무들의 습기로 채워지고

그 지독하게 음습한 기운 때문에

나는 뿌리를 벗어던지고

구름처럼 빙빙 떠돌아다닌다네

비를 내려 구름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네

한결 맑아진 공기가 잠시라도

기분을 채운다면 더욱 좋겠네

물방울이 닿으면 쪼르륵 흘려버리는

젖지 않는 잎을 지닌 나무숲 속에서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장승진 시인(장흥)

1974년 전남 장흥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2년 <시와시학> 봄호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통신두절』(문학의 전당, 2009) 『물은 나무의 생각을 푸르게 물들이고』가 있다. 詩川 동인. 현재 고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