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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명순 시인 / 바람의 본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1.

류명순 시인 / 바람의 본적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은상

 

 


 

 

류명순 시인 / 새들도 변종을 꿈꾼다

 

 

어디선가 새가 운다

새가 새 울음을 물고 새를 부른다

지하철 내부는 새 울음소리 가득하다

새들의 먹이는 톡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톡을 주는 사람들

의자에도 통로에도 이 칸도 저 칸도

톡을 먹은 새들의 배설물이 수북하다

톡끼리 착각하여 더러는 모방에 걸려든다

조건 반사에 낀 손을 확인하며 계면쩍게 웃는다

눈으로 슬쩍 톡을 훔쳐 먹는다

응시하던 시선 빼지 못해 잘라버린다

온통 톡을 먹은 새에 중독된 사람들의 외면外面이다

새들은 늘 변종을 꿈꾼다

지문의 기호들을 모두 탐독하여

GPS도 없이 정확하게 날아간다

강남으로 명동으로 때론 지구 밖으로

사람의 생각을 읽고, 아바타를 들고

이 집 저 집 벨을 누른다

톡을 먹고 사는 저 새들의 지능이 점점 우월해진다

새들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지구는 돌아가고

오늘도 순환선은 한강을 건너가고 있다

 

 


 

류명순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문화교양학부 졸업. 2012년 《시작》 신인상 수상 등단. 시집 『새들도 변종을 꿈꾼다』가 있음. 〈동서커피문학상〉 〈방송대학문학상〉 수상. ‘시인회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