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명순 시인 / 바람의 본적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은상
류명순 시인 / 새들도 변종을 꿈꾼다
어디선가 새가 운다 새가 새 울음을 물고 새를 부른다 지하철 내부는 새 울음소리 가득하다 새들의 먹이는 톡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톡을 주는 사람들 의자에도 통로에도 이 칸도 저 칸도 톡을 먹은 새들의 배설물이 수북하다 톡끼리 착각하여 더러는 모방에 걸려든다 조건 반사에 낀 손을 확인하며 계면쩍게 웃는다 눈으로 슬쩍 톡을 훔쳐 먹는다 응시하던 시선 빼지 못해 잘라버린다 온통 톡을 먹은 새에 중독된 사람들의 외면外面이다 새들은 늘 변종을 꿈꾼다 지문의 기호들을 모두 탐독하여 GPS도 없이 정확하게 날아간다 강남으로 명동으로 때론 지구 밖으로 사람의 생각을 읽고, 아바타를 들고 이 집 저 집 벨을 누른다 톡을 먹고 사는 저 새들의 지능이 점점 우월해진다 새들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지구는 돌아가고 오늘도 순환선은 한강을 건너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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