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영 시인 / 트램폴린
넌 너네 나라에선 외국인이 아니지 그래도 여기에선 네 서툰 한국어가 어설픈 환심을 사고 식당 주인은 호수 옆의 트램폴린을 권한다 단순하고 거대한 그 문자 앞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 트램폴린은 아무런 은유도 없이 우리 사이에 들어온다 그간의 악행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우리도 선의를 갖고 트램폴린을 묘사하고 싶어진다
나는 먼저 느낌을 갖고 간다 부드럽게 그 위에 동작을 얹고 뛰어보지만 트램폴린 위에서 또 트램폴린을 묘사하고 싶어진다
너는 / 일단 뛴다bounced 그리고 느낌을 잡으려고 애쓴다 천천히 slowly 그러나 너의 귀납적인 스타일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 난 트림폴린 위에 on the trampoline 있었지, 하고 네가 다시 번뜩 깨달은 순간 문장은 끝나버린다 트램폴린은 네 관심이 지루하고 너의 문법에는 더더군다나 흥미가 없다
물새는 어떻게 자신이 물속에 들어가면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걸 알까 그깟 트램폴린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될 줄은 몰랐다 걸음을 디디는 내내 트램폴린 생각뿐 지구가 어색해졌다 우리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라서 의혹을 품으면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거기엔 우리가 갖지 못한 외국의 탄성만이 팽팽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가 즐겨 인용한 생 빅토르의 글 "The ma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still a tender beginner "에 대해 널리 퍼진 오역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
전문영 시인 / 웃지 않는 공주
모였으면 일단 웃고 시작하자.
웃으면 서로 가까운 느낌 그 다음엔 서로를 알아가든 말든 오늘의 공주님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 얼굴이 빨개지는 게 무서워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빨간색과 빨개지는 색을 잉크에 녹여 노트에 감금한다 어느날 공주님은 자기 얼굴을 감시하려고 눈알을 뽑아냈는데 실수했다, 눈알을 꺼꾸로 끼워버렸다! 이제 보이는 건 온통 빨간 세상 멍청한 게, 그게 자기 얼굴인 줄 알고 놀라서 빨간색을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얼굴만 더 빨개졌다
공주들 사이에선 입을 가리고 웃는 게 대유행이다 웃음이 바닥나면 그 나머지는 무시무시해진다는 전설 탓이다 그렇다고 진흙탕을 구르며 웃음을 구걸하던 때는 지났다 아 근데 쌍년이, 주먹을 먹이면 빨간색의 나머지 경치가 펄쩍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멍만 떠오르고 미소는 희미한 점선이다 공주님, 네가 웃어야 우리도 웃으면서 실수를 하는데* 시시해지면 표정이 닳는다 얼굴을 치우고 바이커에 오르면 거리는 겁도 없이 얼굴을 들이미는데 도로, 편의점, 주유소. 모두 어디서 본 듯하고 그렇게 가까운 기분이면 바로 웃는 느낌
그런데 거리는 어떻게 웃는 걸까 우리가 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웃는 낯으로 사거리를 척 꺼내들고 우리를 멈춰 세울까 거리가 이렇게 웃음을 남발하면 이제 곧 거리에 남는 건 웃음의 나머지 아, 쫄려서 속도 높인 거 아냐! 이러면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로 보일 줄 알았어 하지만 빨리감기로 웃는 얼굴만 잔뜩 보게 되고 기한 지난 놀이공원 티켓처럼 막막하게 웃기로 했다 거리가 진흙탕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 이젠 공주가 아니어도 무조건 웃어야 된다는 얘기였거든 다 같이 웃으면 무섭지 않거든
웃어, 이거 웃긴 얘기야.
* 인형의 얼굴 속에 웃음이 있기에. 우리는 웃으면서 실수를 저저를 수 있다.-조지프 브로드스키「순수와 경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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