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수 시인 / 아버지의 지등(紙燈) 측간도 쓸고 뒤안도 쓸고 외양간도 쳐내고 휘영청 달 밝은 정월 대보름 아버지는 지등을 달았다 달빛이야 저 먼저 밝았어도 달빛이야 저 혼자 밝았어도 불빛마다 고여오는 당신의 사랑 밤마다 혼자 안고 뒹굴다 밤마다 사립 열고 먼길을 가다 아버지는 지등을 달았다 그것이 눈물인 줄을 모르고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르고 한밤내 지등에다 기름을 부었다
정군수 시인 / 한쪽 가슴이 없는 여자
한쪽 가슴이 없는 여자를 사랑하였다 배가 닿지 못하는 바위섬에서 그녀는 억센 찔레넝쿨만 키우고 살았다 내가 헤엄쳐 건너가자 그녀는 사슴을 키우기 시작했다 찔레순을 먹은 사슴의 머리에서 뿔이 돋자 황폐한 그녀의 가슴에서도 향기가 났다 내가 그녀를 한쪽 가슴이 있는 여자라 불렀을 때 섬은 외롭지 않고 바닷새도 날아와 알을 낳았다 봉우리에서 내려온 사슴은 찔레꽃 핀 언덕에 앉아 바다를 보며 명상하듯 새김질을 하였다 내 가슴 하나가 그녀의 가슴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날 바다는 푸르고 수심은 깊었다 바닷가 절벽에서 바라본 것은 육지가 아니라 그녀의 가슴에 자라난 풀밭이었다 두 개의 뿔과 한 개의 가슴이 사는 섬을 나는 지도에 그려 넣었다
-시집 <한쪽 가슴이 없는 여자>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지호 시인 / 유기 외 1편 (0) | 2023.02.21 |
---|---|
신민철 시인 / 그리고 외 1편 (0) | 2023.02.21 |
전문영 시인 / 트램폴린 외 1편 (0) | 2023.02.21 |
박정석 시인 / 우기의 자화상 (0) | 2023.02.21 |
류명순 시인 / 바람의 본적 외 1편 (0) | 2023.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