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룡 시인 / 주머니 내가 옷을 입는 건 주머니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옷이란 마술사의 복장처럼 주머니가 많을수록 좋다
죄수들의 불행을 보라 그들의 불행은 갇혀있기 때문이 아니다 죄수들의 슬픔은 주머니 없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머니 없는 옷을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때려주고 싶다
파자마에는 주머니가 없다 잠이란 일종의 짧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수의에도 주머니가 없다 죽은 뒤에 영혼이 살아있다는 말도 거짓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갈비뼈 밑에 몰래 눈물주머니를 달고 계신 어머니들 같이 -시집 <작은 평화> 청하, 1987
이세룡 시인 / 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몰래 감추어 둔 대포와 대포 곁에서 잠드는 병사들의 숫자만 믿고 함부로 날뛰던 나라들이 우습겠지요 또한 몰래 감춘 대포를 위해 눈 부릅뜨고 오래 견딘 병사에게 달아 주던 훈장과 훈장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똑같이 우습겠지요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 각자의 생일날 밤에 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총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 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별을 포탄삼아 쏘아댄다면 세계는 밤에도 빛날 테고 사람들은 모두 포탄이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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