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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중하 시인 / 길고양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3.

황중하 시인 / 길고양이

 

 

어둠을 굴리며 놀지만

어둠과 어울려 놀지만

 

어쩌면 조금 외로운지도 몰라요

 

가끔씩 낯선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래서 약간의 접촉을 허용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배가 고프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고프기 때문이에요

 

집 나온 지 꽤 오래되었지만

가출은 아니랍니다

 

그냥 일탈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친구들도 이해하겠죠?

 

-시집 『아진 나는 당신을 처리중입니다』(2021. 시인동네)

 


 

 

황중하 시인 / 예감

 

 

 빗방울이 떨어진다. 내 기억의 거리 속 당신의 얼굴을 가둔 차가운 유리병 같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지며 파편화되는 시간들

 

 기억 속에서 더 반짝이는 깨진 유리병 같은 당신을 줍는다. 현기증처럼 다가오는 예감의 빗방울들, 위험천만한 빗줄기들.

 

 나는 내 마음의 유리병 위에 당신의 이름을 쓰다 지운다. 투명한 비의 연필로, 낡은 흔적을 지우고 다시 내리는 비처럼 새로운 욕망을 욕망하는 나.

 그러나 이내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비의 연필.

 

 나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당신의 욕망도, 나의 욕망도. 내리는 푸른 빗방울의 욕망도.

 

 나는 다만 빗줄기가 위험하다고만 말한다.

 

 사방에서 빗방울이 내리고 빗방울이 깨지고 빗방울이 튀고 다시 빗방울이 몰아친다.

 

 지금은 이 빗방울을 피할 수 없다.

 

-시집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에서

 

 


 

황중하 시인

1982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