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은 시인 / 빚
백일홍이 피었네요 이 백일홍은 언제 피었죠 백만 원을 빌린 마음처럼 요렇게 빨갛게 백일홍백일홍백만원백만원 그러니까 백만 원이 백일홍처럼 들리네요
빚은 한 번에 늘어난 게 아니죠 꽃이 피듯 서서히 피어나죠 이자도 처음부터 많아진 게 아니구요
백일홍 백 송이도 한꺼번에 피었다 지지 않죠
한 송이가 지면 한 송이가 오고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오고 분홍색이 가면 하얀색이 오고 파란색이 가면 자주색이 오고 그 많은 백일홍이 잘못이 없듯 백만 원도 잘못이 없죠
그저 꽃잎을 몇 장 빌린 것뿐이죠 밤새워 백만 원을 세듯 한 잎 두 잎 세면 셀수록 피어나는 게 이자죠 그러니까 이자는 생각하지 마세요 저기 봐요
폭발하듯 꽃들이 피고 있잖아요 꽃망울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최동은 시인 / 리얼리얼
양파 까며 눈물 찔찔 코 훌쩍 리얼리얼 당근 채 썰고 삶은 당면은 미끄러지고 찜통에 갈비는 부글부글 끓고 명절 은 그냥 리얼리얼이야 매운맛도 리얼리얼 유리처럼 확실한 리얼리얼이지 비 오다 바람 불고 이파리들 날리고 이번 추석은 너무 일러 늦장마에 태풍까지 리얼리얼 지붕이 날아가고 가로수가 부러져도 나는 떡을 사야 해 과일을 사고 만능 양념장을 만들어야 해 첫째 동서는 아프고 둘째 동서는 여행 가고 아이들은 학원 가고 나는 약이 올라 참, 혈압약 먹는 걸 잊었네 스멀스멀 징그럽게 종아리를 기어오르는 이것은 뭘까 리얼리 얼 두 손은 종일 물속을 헤엄치고 젤 손톱은 떨어질라 유리컵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데고 리얼리얼 단풍나무야 단풍나무야 빨간색이 먼저니 노란색이 먼저니 저 초록 잎이 내년까지 버틸 수 있다면………… “간이 와 이리 싱겁노" 잔소리가 리얼리얼 이번 추석은 25,675번째 추석상 또 차려지는데 멍멍해진 머리통 속에 예술의 전당 베르나르 뷔페전이 어른대는데 남편은 뷔페는 야수파냐 육체파냐 묻는데 리얼리얼 아무튼 뷔페전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데 뷔페는 무슨 뷔페 동그랑땡 호박전 동태전은 앞에서 지글지글 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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