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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동은 시인 / 빚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1.

최동은 시인 / 빚

 

 

백일홍이 피었네요

이 백일홍은 언제 피었죠

백만 원을 빌린 마음처럼 요렇게 빨갛게

백일홍백일홍백만원백만원

그러니까 백만 원이 백일홍처럼 들리네요

 

빚은 한 번에 늘어난 게 아니죠

꽃이 피듯 서서히 피어나죠

이자도 처음부터 많아진 게 아니구요

 

백일홍 백 송이도 한꺼번에 피었다 지지 않죠

 

한 송이가 지면 한 송이가 오고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오고

분홍색이 가면 하얀색이 오고 파란색이 가면 자주색이 오고

그 많은 백일홍이 잘못이 없듯 백만 원도 잘못이 없죠

 

그저 꽃잎을 몇 장 빌린 것뿐이죠

밤새워 백만 원을 세듯

한 잎 두 잎 세면 셀수록 피어나는 게 이자죠

그러니까 이자는 생각하지 마세요

저기 봐요

 

폭발하듯 꽃들이 피고 있잖아요

꽃망울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최동은 시인 / 리얼리얼

 

양파 까며 눈물 찔찔 코 훌쩍 리얼리얼

당근 채 썰고 삶은 당면은 미끄러지고

찜통에 갈비는 부글부글 끓고 명절

은 그냥 리얼리얼이야 매운맛도 리얼리얼

유리처럼 확실한 리얼리얼이지

비 오다 바람 불고 이파리들 날리고 이번 추석은 너무 일러 늦장마에 태풍까지

리얼리얼 지붕이 날아가고 가로수가

부러져도 나는 떡을 사야 해 과일을 사고

만능 양념장을 만들어야 해

첫째 동서는 아프고 둘째 동서는 여행 가고 아이들은 학원 가고 나는 약이 올라 참,

혈압약 먹는 걸 잊었네 스멀스멀 징그럽게 종아리를 기어오르는 이것은 뭘까 리얼리

얼 두 손은 종일 물속을 헤엄치고 젤 손톱은 떨어질라 유리컵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데고 리얼리얼

단풍나무야 단풍나무야 빨간색이 먼저니 노란색이 먼저니 저 초록 잎이 내년까지

버틸 수 있다면………… “간이 와

이리 싱겁노" 잔소리가 리얼리얼

이번 추석은 25,675번째 추석상 또 차려지는데

멍멍해진 머리통 속에 예술의 전당

베르나르 뷔페전이 어른대는데

남편은 뷔페는 야수파냐 육체파냐 묻는데

리얼리얼 아무튼 뷔페전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데 뷔페는 무슨 뷔페

동그랑땡 호박전 동태전은 앞에서

지글지글 타는데

 

 


 

최동은 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에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전문가과정. 2002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술래>,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