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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상만 시인 / 팔순 낙서八旬落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1.

서상만 시인 / 팔순 낙서八旬落書

- bucket doodie

 

 

이승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그간 세상도 내 편이었을 것 같다만

네들이 있어서 정말 더 행복했단다

얘들아, 이 푸르른 세상은

누구에게나 딱 한 번만의 생이다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라, 나는

내 죽음이 솔직히 두렵지 않다

저승이 어떤 곳인지 몰라도, 평생

부질없이 꼭 쥐었던 주먹 쫙 펴고

날아갈 듯 가볍게 갈 것 같다

내 정신 있을 때 간곡히 부탁한다

나 어느 날 끝내 가사 상태에 들 때

심폐소생술이나 산소호흡기나

대용 식사 주입, 끝없는 연명 행위로

작별의 고통억지로 붙들지 말게

그래도 나 섭섭할 것 하나 없네

생로병사에 감사하며 책임도 지겠네

그간 연례행사가 돼온 외래진료도

이제부턴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네

저승 가는 길은 미륵의 길이다

때 되면 명命대로 조용히 보내주라

아비가 한 것이 없는 빈손이라

미안하다, 빈손으로 왔다는 핑계다

 

-시집 『저문 하늘 열기』에서

 

 


 

 

서상만 시인 / 접시꽃頌

중랑천 변에서, 철삿줄에 감겨

​몸살 앓고 있는 접시꽃나무 하나

​맨손으로 겨우 뿌리만을 캐 와

​목이 긴 화분에 깊숙이 모셨는데

​달포도 넘게 재활의 기로에서

​침묵으로 질척거리더니

​기원에 답하듯 기사회생하였다

​봄 4월부터 10월 가을까지

​무려 50개도 넘는 꽃망울을

​주렁주렁 무성하게 꽃대에 달아

​피고 지고 숨 가쁘게 출렁이는

​진홍색 꽃차례를 거푸 열어준다

​세상에 이런 꽃도 다 있나

​그래 보니 그동안 눈먼 나는

​한두 잎 핀 꽃에도 그냥 홀딱-

​반해버리는, 어이없는 사람

​정처가 바뀌면 그냥 그 자리

​주저앉아 버리는 나의 고정관념

​부끄럽구나, 너무나 나와 다른

​어느 반역의 불꽃 같아

-시집 <그런 날 있었으면>에서

 

 


 

서상만(徐相萬) 시인

1941년 경북 포항시 호미곶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수학.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시간의 사금파리> <그림자를 태우다> <모래알로 울다> <적소> <백동나비>, 동시집 <꼬마 파도의 외출> <너, 정말 까불래?> 등이 있다. 월간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포항문학상, 창릉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