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만 시인 / 팔순 낙서八旬落書 - bucket doodie
이승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그간 세상도 내 편이었을 것 같다만 네들이 있어서 정말 더 행복했단다 얘들아, 이 푸르른 세상은 누구에게나 딱 한 번만의 생이다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라, 나는 내 죽음이 솔직히 두렵지 않다 저승이 어떤 곳인지 몰라도, 평생 부질없이 꼭 쥐었던 주먹 쫙 펴고 날아갈 듯 가볍게 갈 것 같다 내 정신 있을 때 간곡히 부탁한다 나 어느 날 끝내 가사 상태에 들 때 심폐소생술이나 산소호흡기나 대용 식사 주입, 끝없는 연명 행위로 작별의 고통억지로 붙들지 말게 그래도 나 섭섭할 것 하나 없네 생로병사에 감사하며 책임도 지겠네 그간 연례행사가 돼온 외래진료도 이제부턴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네 저승 가는 길은 미륵의 길이다 때 되면 명命대로 조용히 보내주라 아비가 한 것이 없는 빈손이라 미안하다, 빈손으로 왔다는 핑계다
-시집 『저문 하늘 열기』에서
서상만 시인 / 접시꽃頌 중랑천 변에서, 철삿줄에 감겨 몸살 앓고 있는 접시꽃나무 하나 맨손으로 겨우 뿌리만을 캐 와 목이 긴 화분에 깊숙이 모셨는데 달포도 넘게 재활의 기로에서 침묵으로 질척거리더니 기원에 답하듯 기사회생하였다 봄 4월부터 10월 가을까지 무려 50개도 넘는 꽃망울을 주렁주렁 무성하게 꽃대에 달아 피고 지고 숨 가쁘게 출렁이는 진홍색 꽃차례를 거푸 열어준다 세상에 이런 꽃도 다 있나 그래 보니 그동안 눈먼 나는 한두 잎 핀 꽃에도 그냥 홀딱- 반해버리는, 어이없는 사람 정처가 바뀌면 그냥 그 자리 주저앉아 버리는 나의 고정관념 부끄럽구나, 너무나 나와 다른 어느 반역의 불꽃 같아 -시집 <그런 날 있었으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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