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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미린 시인 / 유령기계 1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1.

안미린 시인 / 유령기계 1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

 

 빛과 불을 밝힐까.

 

 악천후에는 유령물을 찾곤 했지. 따뜻한 미래물을 찾곤 했지.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면 가까운 뼈를 가졌다고 생각했어.

 

 얼린 티스푼을 두 눈에 올리면 그 차갑고 환한 기분이 유령의 시야였지,

 

 유령의 등뼈는 더 부서지려는 이상한 반짝임.

 

 크리처가 오고 있어. 들것에 실려 오는 시간

 

 백골색 머리띠를 부러뜨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너의 어떤 면.

 

크리처:  생물, 생명체, 피조물 등을 뜻하는 단어. 조물주가 창조한, 창조주에 대비되는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국내에서는 게임, 특히 온라인 게임 때문인지 괴물의 뜻으로 많이 통용된다. 그러나 크리처는 본래 '몬스터' 같은 뜻은 담고 있지 않은 단어다.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보통 영화에서는 괴물로 통함.

 

 


 

 

안미린 시인 / 유령기계 2

 

 

 풀장의 깊이와 허묘¹의 깊이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술래가 되고 싶어

 

 텅 빈 풀장의 회청색과 청회색 관이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아름다웠어

 

 술래의 말을 더 듣고 싶어

 너무 작은 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는 말

 

 풀장에 가파르게 쌓이는 먼지의 층겹

 여름의 장소가 겨울의 공간이 되는 흐름

 

 우주 냄새 같은 스산함

 숨겨진 일이 끝내 남겨지는 옅은 흔적들

 

 빛을 향해서 눈이 부실 때

 첫 유령이 이토록 투명해지는 인사……

 

 눈이 쌓인 무덤은 철지난 풀장만큼

 걸터앉기 좋았는데

 

 술래들을 기다리면서

 비밀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미래의 술래처럼 슬픔을 기다릴 수 없는 나는

 가만 듣고 있었지

 

 유령은 물이나 뼈에 모여든다는데

 물과 뼈가 없을 때

 

 비밀과 슬픔 중에

 유령을 홀리는 쪽은 어디인지

 

허묘¹:  墟墓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풀에 묻혀 폐허가 된 무덤

 

 


 

 

안미린 시인 / 유령기계 6

 

 

 겨울 무지개를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밤이 되기 전에 눈이 멈췄다는 기록을 남기려던 것이었지만

 흑백 무지개는 느슨하게 빛과 연루되고

 계조를 쌓아 올렸다

 어둠 이하의 밤이 어둠 이상의 밤이 되기까지 깊어지는 것

 주변보다 조금 하얀 얼룩은 유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령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는가 하는 옅은 기록의 계열 창백한 빛이 닿은 필름조차 유령의 일이 아니었다

 

 텅 빈 어둠에 빛이 닿을 때 그 환한 기분의 형태가 부풀어 올라

 사라진 피사체는 스스로 유령인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잠상으로 잊혔다

 

 밝은 창가에 유령의 독사진이 쌓여가고

 흑백 무지개가 빛바래고 있었다

 

-시집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 중에서

 

 


 

안미린 (安美鱗) 시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첫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