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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재영 시인 / 구월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1.

유재영 시인 / 구월은​

 

 

 구월은 유난히 텅 빈 오지 항아리에 와 있었다

 구월은 쓰다 만 엽서 틀린 맞춤법 속에도 와 있었다

 구월은 흑백 사진 속 잊혀진 친구의 이름 위에도 와 있었다

 구월은 삼촌 제삿날 쌀 씻는 어머니의 가슴에도 와 있었다

 강과 과일밭과 노을과 예배당의 빨간 함석 지붕과 마디 가는 들풀과 젊은 느릅나무 아래 죽은 장수하늘소의 시체 위에도 구월은 와 있었다

 구월은 와 있었다

 

 


 

 

유재영 시인 / 동행

 

 

 100년 뒤에는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별이 있다 지구 동쪽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비친 그 별빛을 천년 동안이나 떠 마셨다 지는 나뭇잎도 별빛을 함부로 가리지 마라.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밤에도 마지막 그 별을 보며 사막 한가운데를 가는 사람이 있으리니

 

 


 

 

유재영 시인 / 그날

 

 

 전쟁이 한창이던 그날 무슨 일인지 경찰에 쫓기던 동네 청년이 우리집으로 뛰어들었다 몸에 맞지는 않았지만 이미 경찰은 그를 향해 두 발이나 총을 쏜 상태. 어머니는 재빨리 안방 다락에 숨기고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흥분한 경찰이 곧바로 들이닥쳐 집 안을 속속들이 뒤졌지만 안방 다락만큼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시집 『구름 농사』 2022 동학사

 

 


 

유재영 시인

1948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1973년 박목월(시)과 이태극(시조) 추천으로 시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한 방울의 피』, 『지상의 중심이 되어』,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등과 시조집 『햇빛시간』, 『절반의 고요』, 4인집『네사람의 얼굴』 『네사람의 노래』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이호우문학상, 편운문학상, 가람상, 한용운 시인상 등 수상.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