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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영심 시인 / 응급실의 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1.

진영심 시인 / 응급실의 밤

 

 

 배에 가로막이 걸쳐있는 것 같구나 노모에게서 전화가 오고 공중을 거스르지 못한 톱니의 비가 온다 응급실 문을 열면 반대편 본관으로 향하는 또 하나 문이 있다 그 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잠깐 잊는다 병실 안쪽 눈을 들면 일인용 병상만이 사방에 벽을 대고 있다 일인용에서 칸을 더 넓힐 수 없다 아무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직 단독자로 있다 한 움큼 들숨과 날숨의 간절함으로 다시 숨이 차오르기 위한 안간힘으로

 

 링거 폴대들 휴전의 깃발처럼 서 있다 아이는 아이끼리 노인은 노인끼리 서로에게 투명 울타리를 조금씩 두르고 있다 콧줄만이 양식인 구십 노인, 코골이를 관 속에 가둔 듯 조용하다 어제보다 더 굽은 등을 업은 노모 화장실 문턱에서 폴대를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휘청이는 당신 등에 대고 손사래 치지 않는다

 

 바위처럼 육신을 공중에 매달아 지상에 패대기치는 시간들이 머문다 감각할 수 없는 전신이 비애로 흥건하다 평안한 피가 지혈된다 붕대로 온몸 친친 동여맨 아버지 얼굴 위로 눈물이 제 몸 풀어 세상을 달구는, 잔해의 아슬한 공간

 

 정적이 불안한 순간 구급대에 실려 온, 이곳과 저곳을 따질 수 없는, 노인 다리 위 30센티 넘게 부푼 배가 거세게 출렁인다 출구를 찾을 수 없어 흘러나오지 못한 것들은 압력이 되었다 석션! 한가운데 중환자구역 커튼이 쳐지고 숨구멍을 세우는 가쁜 손들은 보이지 않는다 커튼 사이 축 처진 주름진 손 하나 미동조차 없다 침상 주변 찢긴 상처나 통증들이 입 다물 때 커튼이 걷히고 본관 쪽 문이 열린다

 

 희디흰 포 하나가 사라진다 구급대원은 공중에 펼쳐진 흰 포를 놓치고서 뒷모습 같은 얼굴로 서 있다

 

 이곳에서 으스러진 육신 너머 으깨어지지 않는 고통 너머, 돌아오지 않는 의식을 이어붙이는 자들의 손이 나무의 상처 안에서 자라는 차가버섯으로 늘려질 때 장갑 안 가득하던 핏물을 성수聖水로 바꿀 때

 

 응급실 밖 밤비가 거스르지 못한 톱니의 공기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 시집 『생각하는 구름으로 떠오르는 일』, 천년의시작

 

 


 

 

진영심 시인 / 물 먹는 하마를 한 칸 옷장 안에 넣어 두다

 

 

당신을 반려합니다

 

희미하다는 말을 들으면 달빛을 숲 가장자리에 놓았다

또렷해지지 않으면 그림자로 움직이는 거인을 키웠다

 

내가 만드는 길이 미로일 때

그들이 가꾸는 숲은 끝내 모호했다

푸르러지려 한 나무를 숲은 버리는가

 

에리카꽃 동공이 나를 찌르며 나아가고

누구도 오르지 않는 계단이 나를 향해 뻗어 온다

 

아픈 고백을 듣고 기도하던 사제들은 성당에서 멀어진다

차라리 나로서 마취되는 것만 골라 옷장에 넣어 둘까

 

연민에 솔깃한 방송국 사람들이 오랜 은둔을 찾아 취재한다

대낮에 쳐 둔 검은 커튼을 젖히며 태양을 심어 주겠다 한다

 

눈이 멀어요 커튼을 젖히지 말아요

캄캄한 방 안에선 유일한 표정이 산다

 

서른 살 늙은 아이의 얼굴은

최후를 모르는 새들의 동공을 갖는다 전화도 연락하는 법도 잊는다

 

습기와 눈물을 얼려 단단하던 하마는

죽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물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물결은 고동치지 않는 심장을 연습한다

 

만져서 좋았던 것들과 나에게 지원되던 액세서리들은 강물에 떠다닌다

취업 안내서와 이력서와 핸드폰과 일기장

 

남겨지는 것과 버릴 것 사이에서 나를 보러 오진 않던 사람들이 흠향한다

 

향기로운 식물에 물을 주는 착한 사람이 불쑥 문을 열면

빛깔을 지닌 강물은 와락 쏟아지고

 

아무것도 움켜쥘 수 없어 물결을 이루고

색색은 겹쳐 검은 강물이 되고

 

-시집 『생각하는 구름으로 떠오르는 일』에서

 

 


 

진영심 시인

전북 완주 출생. 전북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석사 졸업. 2019년 《시현실》로 등단. 시집 『생각하는 구름으로 떠오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