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시인 / 구월은
구월은 유난히 텅 빈 오지 항아리에 와 있었다 구월은 쓰다 만 엽서 틀린 맞춤법 속에도 와 있었다 구월은 흑백 사진 속 잊혀진 친구의 이름 위에도 와 있었다 구월은 삼촌 제삿날 쌀 씻는 어머니의 가슴에도 와 있었다 강과 과일밭과 노을과 예배당의 빨간 함석 지붕과 마디 가는 들풀과 젊은 느릅나무 아래 죽은 장수하늘소의 시체 위에도 구월은 와 있었다 구월은 와 있었다
유재영 시인 / 동행
100년 뒤에는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별이 있다 지구 동쪽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비친 그 별빛을 천년 동안이나 떠 마셨다 지는 나뭇잎도 별빛을 함부로 가리지 마라.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밤에도 마지막 그 별을 보며 사막 한가운데를 가는 사람이 있으리니
유재영 시인 / 그날
전쟁이 한창이던 그날 무슨 일인지 경찰에 쫓기던 동네 청년이 우리집으로 뛰어들었다 몸에 맞지는 않았지만 이미 경찰은 그를 향해 두 발이나 총을 쏜 상태. 어머니는 재빨리 안방 다락에 숨기고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흥분한 경찰이 곧바로 들이닥쳐 집 안을 속속들이 뒤졌지만 안방 다락만큼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시집 『구름 농사』 2022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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