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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주철 시인 / 노인이 되는 방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7.

안주철 시인 / 노인이 되는 방법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 있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미인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 2015년

 

 


 

 

안주철 시인 / 눈물을 흘리는 자세​

​집에 돌아와 어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캄캄한 사방이 조금 편하게 느껴졌다

방바닥에 엎드렸던 어둠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어둠에도 부드러운 털이 있는 걸까

손바닥에 간지러웠다

눈물이 고였다

왜 고였는지 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서서 울기로 했다

내일은 앉아서 편하게 눈물을 흘릴 계획이다

누워서 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서서 울면 눈물은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낼 것 같다

이런 생각이 가끔 하루를 버티게 한다

내일은 앉아서 편하게 울어야겠다 결심했다

이런 생각도 가끔 하루를 지워준다

베갯잇에 눈물이 스며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듯하다

아닐 수도 있는데

지금 이런 소리가 필요하다

눈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다음 주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세를 바꾸려 한다

눈물이

눈물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서

-웹진 『님』 2023.02중에서

 

 


 

 

안주철 시인 / 보르헤스의 시

 

 

동그랗게 말린 시를 건네면서

보르헤스는 낭독을 부탁했다

 

대답 대신

동그랗게 말린 시를 서서히 펴고

시를 바라보았다

 

라틴어로 쓴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수 없었지만

 

계속 들여다보아도

긴장이 되거나 관객이 두렵지 않았다

 

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글자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도

관객도

나도 사라졌지만

 

꽃이 계속해서 자랐다

 

 


 

안주철 시인

197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배재대 국문학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