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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생의 한가운데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7.

천양희 시인 / 생의 한가운데

 

 

바람속의 영혼처럼

눈이 날린다

 

홀로 걷다 돌아보니

나홀로 청년들이 실업에 울고 있다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잠을 청한다 청해도 잠은 안 오고

 

짙어진 나뭇잎 속에

아슬하게 줄을 치는

거미를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저 줄에도

한 생이 걸려 있구나

 

나도 그것으로 한 생을 견뎠다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으면서

 

행복을 돌돌 말아

너에게 던져줄게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것

그 거룩을

한 줄로 써서 보내줄게

 

생의 한가운데는

움푹 패였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오늘도

어느 곳에선가

뜬구름 잡는 일이 일어나고

다리에 쥐가 난 사람들이 걸어가고

 

어느날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낮달을 뚫고 날아간다

 

그래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바람속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가운데를 생각한다

 

아무튼

성자聖者는

시계를 가지지 않는다

 

계간 『애지』 2023년 봄호 발표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 소월시문학상을,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