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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잎 시인 / 잠 속의 숲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4.

박잎 시인 / 잠 속의 숲

 

 

 짙은 안개 화절령 길 위에서 꿈을 더듬네

 

 진눈깨비 날리는 밤, 늙은 나는 간드레 등을 낮게 들고 숲으로 향했지 카바이트 불꽃은 아련하게 허공으로 번져 갔어 불꽃은 밤 화물열차의 꼬리를 쫓다가 흩어지더군 화절령, 숲으로 가는 밤길은 멀었지 겨울 고목은 역두에서 눈을 맞고 있었어 탄의 자취 간데없고 적막한 선로의 등燈, 꿈 속의 화절령 같은 붉은 새 뗴로 뒤덮여 있었어 해발 920미터. 빽빽이 몸을 붙인 새들은 탄부의 마을 길을 메우고, 메운 채 열을 지어 앉아 있었지 문득 푸른 헤드라이트 질주해 오고 새들은 겨울 흙길에 얼어붙어 있었어

 

 다시 고갯길. 먼지의 숲, 푹푹 발목이 잠겼어 갈참나무 잎새마저 탄가루로 자욱했어 그 길 가운데 커다란 매 한 마리, 바람 속 매의 눈은 강렬하게 빛났지 삼킬 듯 삼킬 듯이 먼지바람은 나를 화절령으로 몰아붙였어 돌아보니 걸어온 길은 절벽으로 변해 있고, 어느덧 난 매 앞에 서 있었지 난 푸른 모자를 쓴 난쟁이였어 입을 벌리며 매는 푹 스러졌어 고꾸라진 매는 순식간에 재로 변했어

 

 안개 속 화절령 갈참나무 잎 사운대고

 훠어이 훠어이, 슬픈 매의 환영

 

-시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에서

 

 


 

 

박잎 시인 / 파밭에서 울다

 

​화절령 숲에 이르기 전,

무너져가는 흙벽 아래

파밭을 보았네

빽빽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파잎 사이에서 홀로 흔들렸네

가만가만 바랜 먼지로

남겨진 이름 불러보았네

사북 그 봄날

들척지근한 피비린내 속에

번지던 목소리

"죽을맨치 때려도 좋으니 밥만 더 줘요!"

후산부 천칠성은 백치에 가깝다 들었네

옛 갱구에 탄가루 분분한 날

서른, 한 생이 저물었지

화절령 숲에 이르기 전,

붉은 흙벽 아래

파밭을 보았네

나는 퍼런 파잎사귀로 눈물을 싼 후,

멀리 흘려보냈네

 

 


 

박잎 시인

충남대 영문과와 성균관대 영문과 대학원 졸업. 2017년 《월간 시》를 해 등단. 시집으로 『꿈, 흰 말』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가 있음. 2019년 『월간 시』 제정 ‘올해의 시인상’ 수상. 2021년 강원문화재단 시부문 생애최초지원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