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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경 시인 / 뒤통수가 얼굴로 돌아올 때까지
쓰지 않는 창문 한쪽이 되는 꿈을 꾸었다 겉창을 열면 꼭 그만큼의 크기로 가려지는 퇴화를 기다리다 외로워진 몸들이 거기, 엄지손가락처럼 뭉툭하게 서려 있었다
반쯤은 흐릿하고 반쯤은 분명해진
암흑에도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연약한 윤곽을 뭉쳐놓는 빛, 그 중심으로 무거워진 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눈과 입을 덧칠해도 늘 뒤통수가 환해지는
잠에서 깰 때마다 표정을 한 가지씩 잃어버렸다
박자를 놓쳐버린 심장을 빨래 건조대에 널어도 물비린내가 가시지 않고 끔찍하게 파고드는 온기 선연해서 더럽고 불온한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딱딱한 말들이 먼저 도착해 있는 세계 망각에도 자라나는 얼굴이 있을까
밤새 쌓인 허공을 털어내려 창문은 방 안을 다 가져가버렸고 꿈을 뒤척이는 동안 모서리는 내 소매를 갉아먹었다
그날 아무것도 꾸지 못했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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