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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연 시인 / 나무랄 데 없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5.
김효연 시인 / 나무랄 데 없는

김효연 시인 / 나무랄 데 없는

 

 

사계절은 꽃다발입니까

 돌림으로 나무랄 데 없을까요

 봄여름가을겨울은 둥글게 허리를 껴안고 잘 묶여있습니다

 사는 생각만큼 깁니다

 사는 게 긴 것처럼

 점점 길어진다면 뱃살, 혓바닥도 묶어주세요

 머리를 총총 땋은 봄은 언제나 혼자입니다

 계절이 수천 바퀴 돌아도

 천지사방에 다발다발 꽃은 부려놓고

 홀로 뭘 바라보겠다는 것인지요

 위태롭진 않더라도 베개 한 개는 독방이잖아요

 어쨌거나 짝은 두 개가 이성적이 될 것입니다

 마트에서 1+1 상품을 덥석 잡게 되는 건

 배고픈 장바구닌지

 열 개도 모자라서 외로운 손가락인지

 한 개를 더 보태는 건 마케팅이 아니라

 어느 외톨이가 매운 라면이든 부드러운 치솔이든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봄보다 봄봄

 쌍보다 쌍쌍

 노부부가 넘어질세라 팔짱을 끼고 걸어갑니다

 두 손은 엉덩이를 싸안고 두 팔은 목을 껴안은

 청춘 뒤에 꼬리 두 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늘도 계산대 위에는 묶음이 수북하고요

 

-계간 <시와반시> 2022년 봄호

 

 


 

 

김효연 시인 / 오라버니

 

 

 뛴다. 자정도 급히 오고 있다. 나이 든 여자가 숨 가쁘게 내려온다. 마을버스는 뒤늦게 깨달은 듯이 쌩 올라간다. 더 나이든 남자가 헐떡이며,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간다. 릴레이 하듯 달린다. 선두는 기필코 빨라야 한다. 간격이 한참 벌어지자 바통 마냥 움켜쥔 푸른 지폐가 맥없이 풀리며 멈춰 선다.

 

 아뿔싸! 오던 길 되돌아 뛴다. 다리만 기어간다. 자정은 더 급히 오려 한다. 저만치서 손사래 치며 오는 가방을 홱 낚아채 다시 달린다. 마지막 지하철을 붙잡자 속이 울렁거린다.

 

 -니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 잘 뛰노. 가방 안에 오만 원 넣었데이 꼭 택시타고 가래이.

 

 다리 다쳐 벌이 없이 지낸 지 수 년째. 이젠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빠삐용의 속옷에서 나온 듯한 만 원짜리 다섯 장. 어느 새 여자의 머리는 정신줄 놓고 춤을 춘다. 무슨 보물단지인 양 끌어안은 가방에서 노랑병아리 나오겠다.

 

  


 

 

김효연 시인 / 애국가를 빙자한 가족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아버지

낮술이 주전자를 쥐어박거나

핏발선 눈이 막판 오광에 몰려 있거나

내 눈두덩이 증오를 던지거나

 

마르고 닳도록

어머니

생선대가리를 내리치거나

일수 도장을 찍거나

파스를 칠갑하거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오빠 만세

광복절 특사에서 제명되거나

 

개천에서 용 났지만

개천에선 절대 용이 날 수 없어요

철학도 없이 태어난 나는 호시탐탐

호적을 팔까

처녀를 팔까

 

애국가를 부르면서 애국, 애국밖에 생각 안 나는가 봐요

눈물까지 앞을 가리면서

 

태극기를 마당에 꽂으며 혹시

함께 애국가를 부를 혈연의 그날이 온다면

 

후렴은 그때

 

-시집 『구름의 진보적 성향』에서

 


 

 

김효연 시인 / 증인

 

 

네안데르탈인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동안

보행기가 치매 할머니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동안

뇌수막염이 그녀 뇌를 절반 넘게 파먹는 동안

배꼽이 탯줄을 놓치는 동안

한 남자가 백골로 건너가는 동안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핥으며

복지학 개론서를 뒤적이며

밑줄을 나이프로 자르며

골머리를 식히려

나는 남쪽의 휴양지를 향해

가고 있다

 

 


 

 

김효연 시인 / six feet under

 

 

張은 오 개월 후면 여든이 되는군요

내 오랜 친구죠

吳는 여든하고 사십 육 개월이 더 지났어요

내 엄마죠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인데 언제부턴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기가 막혔어요

내게 지도와 신발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따돌리고 그렇게 합이 맞을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오는 파키슨 병으로 춤추듯 손발이 떨고

장은 찜통더위에도 온돌매트에서 떠나지를 않는데요

나의 미래들은 그렇게 아낌없이 친절하더니

남의 일엔 실없이 울어쌓더니

지금에 와서 자신들을 챙기기 시작하는데

어이가 없어요

오와 장은 매일 밤 지하에서 만나

닫힌 문을 열려고 서로 용을 쓰나 봐요

장은 글벗이었고 술친구며 오는 관광춤을 잘 추던 엄마예요

둘은 이제 내게서 멀어지려고 해요

세상에서 젤 가벼운 차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요

바는 물론 나이트클럽도 못 가본 주제에

땅 밑을 무슨 수로 찾아간다고

 

난 어젯밤에도 15 feet under*에서 새벽을 맞았죠

그네들이 찾는 곳보다 두 배도 더 깊은 곳에서

문을 활짝 열고 귀신들도 일어나 놀만큼 재미있다고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꼬셔볼까요

 

*클럽

 

 


 

 

김효연 시인 / 징후

 

술병을 숨긴 나를 바람직하지 않게 본다면

그건 순전히 계산된 커튼 탓이다

아이들 장래희망이 러시아 마피아나 나이트클럽 회장인 건

치밀하지 못한 계획 때문이며

불길해 보이는 새가 날아와

커튼을 콕콕 쪼아대는 건

불결이거나 순결로 정의해야 한다

의심이 믿음을 낳는다

누군가 내 뒤를 캐고 다닌다면

소심하게 호박씨 까는 손이 곤두서지 않겠는가

자위하듯 쓰는 글이 까무러치지 않겠는가

조롱 속 새는 일생을 조롱 속에서

끝내고 내 이름이 조롱 속에 갇힌다면

구토가 발작

지렁이, 도마뱀, 바퀴벌레를 다 게워내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안주 삼아 술을 들이킨다고

나를 술병으로 본다면 그건

순전히 어떤 불안 탓이다

 

-시집 『구름의 진보적 성향』 중에서

 

 


 

 

김효연 시인 / 이쑤시개가 슬프지 않다

 

 

바라본다

 

맨발 맨엉덩이, 양말목으로 늘어난 맨젖가슴이

뭔가 담긴 듯한 배에 닿아 있다

파묻은 얼굴, 가시덤불이 맨등을 타고 내려가는

 

백 년 전이나 이백 년 후에도 드레스는 다른 곳으로 배달되고

슬픔*은 벗겨진 채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나는 슬픔 때문에 죽을 일 없는데

베르테르는 단숨에 갔다

그렇다고 돌지도 않겠지만

고흐는 서서히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도끼들이 떼어간 둘째 동생의 콩팥 한 알은 여태 못 찾아오고

진통제를 겹겹 붙이고 삼켜도 서랍마다 신음이 고이고

사방 벽은 못 참겠다는 듯 헛소릴 쏟아낸다

 

이승 아닌 저승은 더욱 아닌 병실에서 멀쩡한 생각을

달력 속에 넣고 있는 엄마의

보금자리도 깃털로 날아 가버렸다

 

슬픔은 나누면 온전한 내 몫이 되지 않는다

 

넘치는 그것을 어떻게 소비할까

흔하고 하찮아서 톡 분지르거나 버려도 하수구가 막히지 않는

이쑤시개라면

 

식당 밖으로 물고 나와 쑤시고 파는 데 열중하다 미련 없이 던지면

짓밟힌들, 파묻힌들

지렁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빈센트 반 고흐 작품

 

 


 

김효연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필명 김문주). 2006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구름의 진보적 성향』 『무서운 이순 씨』. 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2019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