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윤정 시인(상주) / 푸른 숫자의 시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5.
이윤정 시인(상주) / 푸른 숫자의 시간

이윤정 시인(상주) / 푸른 숫자의 시간

 

 시간이 해바라기 꽃으로 모여들고 있네 태엽은 쉬지 않고 감기고 있어 자꾸만 닫히는 귀를 열어도 노랗게 시든 말은 둥근 시계탑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광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키가 쑥쑥 자라고 노란 얼굴들은 분홍 뺨을 가지고 싶어 해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던 시계는 빛의 타래를 감고 있어 초침은 푸른 숫자를 세며 여물어 갔지 노랗게 물드는 시간은 고흐가 귀를 자른 시간, 여름은 부엽처럼 떠돌고 있어 무수한 빗소리들만 흘러들고 있는데 귀는 어디쯤에서 듣고 있을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도 시간의 은신처가 있지 분침은 멈춰 있고 시침 없는 시간은 모두 불현듯 혹은 어느새라는 말 속에 숨어 있지 씨앗에 째깍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들어 볼래 자꾸 입에 오물거리지 말고 이 까만 씨앗으로 몰려드는 시간들을 좀 보라니까 시간을 가득 채운 꽃들은 정원을 떠나고 있어 가벼운 무게로 서 있는 공중의 시간들 밤의 숫자를 다 채운 둥근 시계탑은 종소리를 울리지 않아 아침마다 찾아오는 새들의 안부가 추를 흔들 뿐이지 반복적인 것들은 웃음이 없지만 고개를 한번 돌려 봐 찰칵, 숫자의 시간들이 푸른 행성을 돌리는 것 보이지 나는 태엽을 감으며 붕붕거리는 날개를 자꾸만 뒤로 돌리고 싶었어

 

-시집 『세상의 모든 달은 고래가 낳았다』, 파란, 2022

 

 


 

 

이윤정 시인 / 봄눈

 

 

나뭇가지에 앉은 봄눈

뭉쳐져 있는 마디를 풀면 뿌리까지 잠이 뻗은

나무의 몇 겹 눈꺼풀이 풀린다

그 눈꺼풀 풀린 곳마다 시력들이 몰려든다

잎눈마다 다닥다닥 붙은 투명한 망막들은

눈인 듯 싶다가도 휩쓸리는 말만 배우는 입인 듯 하다

 

세상에서 가장 얇고 짧은 뜬눈을 가지고 있는 눈

눈 뜨자마자 첫 풍경을 연둣빛 새싹에게 주고

어디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찾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 졸졸거리는 귀로 흐르고 있다

 

눈 뜨는 생강나무 얇은 렌즈를 끼고 보는

세상의 첫 풍경은 노랗다

녹아내린 눈은 나뭇가지에 접목되고

흐르는 물소리가 커지면 달력의 숫자들이 봉긋 부풀어 오른다

부푼 잎눈을 들여다보면 쏟아질 듯

찰랑거리는 물이 가득 고여 있고

구석구석 부풀린 그림자 들여놓은 발자국은 파릇하다

새의 부리가 짧아지는 한나절

나뭇가지는 한층 밝아진 눈으로 초록 화살을 다듬고 있다

날아가는 법보다 뛰어내리는 법을 배우고

앉아 있는 것 같지만 항상 서 있는 새들

제 발자국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어느 사이엔가 어지러운 꽃잎들을 물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마도 봄눈은 멀리 여울에 도착해있을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이윤정 시인(상주) / 오름 낙과

 

 

그 말은 둥글어서 슬펐던 거야

착 붙은 불안까지 떨어져 버렸지

오름을 벗어난 건 달의 주기를 버렸기 때문

설익은 말이 담장을 넘고 말았지

속도는 빨랐고 이미 꺾여버린 커브는 돌릴 수 없었어

 

낙차가 큰 말일수록

달을 익힌 다음에 곡선을 그려야 했어

서쪽으로 떨어지는 이해는

노을의 무게까지 포용하지 못해서일까

 

너에게 딱 맞는 안착은 어떤 각도일까

내가 던진 말을 언제쯤 두 어깨로 받아줄 수 있을까

 

꼭지에 묶인 약속은 지킬 수 없어 불안하다는 거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어

지우지 못한 관계는 문장보다 더 붉은색

 

네가 던지는 그 말이 누구를 향하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어

방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절박했던 순간에 날아오는 것들은 모두 떨어지게 되어 있었던 거야

 

비극은 결말을 보여주지 않을 때 희극이 될 수도 있으니까

바닥에 쌓인 헛웃음들은 한때의 오름이었다고 생각할게

 

짓물린 말들이 떨어지는 건

우리들의 낙마라고도 할 수 있을까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이윤정 시인(상주) / 우리가 행성으로 서로를 겉돌고 있을 때

 

 

무게를 버린 선은 씁쓸하다

이탈한 곳에서 생겨나는 오해

한쪽이 기울어져야 하는 진실을 인정하면 간격은 좁혀질까

 

넓은 너는 등에 길쭉한 배낭이 적격이라면

뾰족한 나는 깃털 달린 날개가 어울린다고 말해 주면 좋겠어

떨리는 추를 놓고 서로의 감정이 흔들린다

우리는 행성으로 서로를 겉돌고 있다

 

오르내리는 너와 나는

오차의 범위를 벗어나 뒤섞이는 부등이다

 

떨리다가 멈추는 선은

미세한 오해에도 참과 거짓으로 얼굴을 뒤집는다

 

뒤집힌 감정은 저울질하지 않는 게 불문율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새로 사그라지는 거품일 뿐이니까

 

밀고 당기는 관계에서 무게 버린 선은 0점에 있다

나뭇잎 한 장 파르르 떨리고

 

그때 기울어진 쪽으로 얼굴 한 점 얹혀 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이윤정 시인(상주) / 이식

 

트럭 적재함에 어린 묘목들이 실려 간다

비틀거리며 가는 거리는 몇 킬로쯤일까

궁금한 거리를 재는 듯 차의 속도에 맞춰 이파리를 흔든다

실려 가는 적재함에서 뿌리를 박으려는 허공이 허우적거린다

고정이라는 곳은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흔들리는 자리라는 걸 알까

어린 연두 빛이 핼쑥한 멀미를 앓는다

묘목들을 태우고 저속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커브를 돌면

속도에 몸을 맡기며 기울어지는 밀착

나무가 평생을 서서 키우는 거리는 늘 제자리겠지만

오늘 저 철없는 것들의 흔들림은 꽤 먼 거리를 달리고 있다

달랑거리다 또 출렁거리는 봄볕을 달고

파르스름하게 물드는 멀미를 달고

어느 정원의 풍경이 되는 상상으로 가지런하다

이 저속의 길을 얼마나 더 달려야 정원에 설 수 있을까

세워지는 날로부터 움켜쥐는 법을 배워야 하는

뿌리의 본능은 중심을 잡기 위해 또 흔들리겠지

발을 묻고 서서 이식을 견뎌야 할 나날들

보름달 뜨는 연못의 옆이라도 얻는다면

가끔은 제 그림자를 건져 바람에 말리기도 하겠지

하늘 연못으로 흰 양의 무리들이 모여든다

떠나온 곳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쌓이는 갈증은 낯선 물길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브레이크에 기우는 속도는 바람에 휘어질 각도를 미리 연습하며 휘어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3년 여름호)

 

 


 

 

이윤정 시인(상주) / 타크나 흰 구름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이윤정 시인(상주) / 일식

 

 

언제부턴가 우물을 들여다보던 얼굴이 사라졌다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물비린내 묻은 저녁이 들어차고

물에서 자란 귀는 지느러미 사이에서 이명을 앓았다

 

달의 공전주기를 배우는 동안 말끝에선 푸른 이끼가 자랐다

목마른 아이가 던진 말은 수심을 돌아

낙차가 긴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멀미 가득한 얼굴이 허리를 펴고 점점 자라난다

 

난간에는 언제나 물기가 가득했고

두레박을 던졌다 들어 올리면 탈피된 얼굴이 흘러넘쳤다

아이를 찾아 우물로 들어갔을 때

달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차도르를 두르고 모래언덕을 내려오는

아이의 눈동자에 찰랑거리는 우물이 보인다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얼굴엔 출렁거림이 묻어 있고

주름진 계곡이 생겨났다

 

아무도 찾지 않는 복개된 우물은 캄캄한 일식 중이다

 

 


 

 

이윤정 시인(상주) / 재스민의 세계

 

 

이 향기를 꺾어 버릴까

 

그녀의 향기는 가파르다

골목 모퉁이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끊어질 듯 달려 나온다

 

나는 튀어나온 소리를 자르고 재채기를 한다

몸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은밀한 테러에 통증이 번진다

떨어진 향기는 바닥에서 비명을 지른다

습관처럼 향기를 접어 휴지통에 넣는다

 

찢어진 비명에는 고양이 수염이 숨어 있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간지러움에

알레르기의 기생을 생각했고

문득 비명이 고양이에게로 옮겨 간 것이라 확신했다

 

재스민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눈을 감고 비명과 향기를 구분해 본다

한 번의 입맞춤도 없이

탐구하듯 향기 속을 걷는다

 

흥분한 재채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재스민이 하는 기침이라 생각한다

색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토해 내는 통증들

향기는 자란다 아무리 꺾어도

 

그녀가 다시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다

재스민에게는 나만 아는 세계가 있다

 

 


 

이윤정 시인(상주)

1961년 경북 상주(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2019년 경기문화재단우수작가 선정. 시집 『세상의 모든 달은 고래가 낳았다』.  2022년 세종 문학나눔도서 선정. 2022년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