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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지엽 시인 / 그 작고 낮은 세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5.
이지엽 시인 / 그 작고 낮은 세상

이지엽 시인 / 그 작고 낮은 세상

-가벼워짐에 대하여·7

 

 

경북 안동 와룡면 오천군자리 탁청정 아래

근시재 그 아래 침락정요

동서로 마주 세운 그 문 말이예요

맵시가 작고 귀여운 그 문 말이예요

누구든 몸 궁그리고

허리 굽혀 지나가는 그 문 말이예요

 

전남 담양 소쇄원의 소쇄소쇄 부는 바람요

지나가다 꼭 한 번은 곁눈질하는

광풍제월각 앞 낮은 담이요

누구나가 허리께 차는 그 낮은 담 말이예요

밝은 그림자들 옹기종기 꽃씨 뿌리고 있는

그 순딩이 흙담 말이예요

 

나직하게 불러도

얼른 달려와 왜? 왜에? 고개 쳐들어 줄 것 같은 그런

친구 말이예요

 

 


 

 

이지엽 시인 / 거시기

 

 

세상에는 더러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아십니까 연약하기만한 달팽이의 혀에도

이빨이 나 있다는 것을

한두 개, 열서너 개도 아니고 자그만치

1만여 개가 나 있다는 사실을요

 

바다로 몰아내도 한사코 뭍으로 올라와

기꺼이 죽는 고래들도

뭍이 자가네들 고향이라는것을 아는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총칼 들이대던

남과 북의 가슴들이

저멀리 바다 건너 시드니에서

뜨겁게 만나 뜨겁게 어우러진 것도

그것이 그러니까 믿기지 않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뭉쳐올라

마침내는 터져버린 거시기라고 할 것일 밖에는요

 

 


 

 

이지엽 시인 / 새벽, 안개에 갇히다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마음이란 없는가

길 위에서 길을 잃듯 생각을 하다 생각을 잃고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곳에 닻을 내린다

그러기에 정박 중인 나의 낡은 배들은

쉼 없이 중얼거리며 출렁거려야 하리

죽음은 끊어진 섬처럼 갑자기 오리라

 

드디어는 네 중심에 이르렀다 확신했을 때

미끄러져 나가는 손, 이름이 지워지고    

어느새 뜨거운 포옹도 물가로 밀려나와 있다

패총처럼 쌓이는 시간의 무덤을 향해    

전조등을 켜고 더듬더듬 나아가는 生

흔들어 작별하기엔 산은 멀고 길은 젖어 있다

 

 


 

 

이지엽 시인 / 새

 

 

 1

 이것이 너를 보내는 마지막 자리라면 은유나 상징으로 눈 감은 채 건너고 싶다

 

 애둘러 돌아간 자리

 남아 있는 말줄임표

 

 2

 아마 날고 싶은 꿈은 수억 년 전이었으리 트라이아스기에서 백악기까지 날던 익룡

 

 우항리(里)물갈퀴새 발자국,

 햇살들도 울고 있다

 

 3

 누가 너를 감춰뒀다 메아리로 풀어놓았을까 바닥의 삶이라도 우화하는 꿈의 날개

 

 사람들 저녁 하늘을 보며

 일순 평안해진다

 

 


 

 

이지엽 시인 / 해남 여자

 

 

1. 호박 고구마

약간은 물컹하고 약간은 달달한 맛

편하고 이므럽고 잔정 많고 수더분해

동치미 좋아하는 여자 눈밭 같이 걷자는 여자

 

2. 간척미

바닷바람 갯내음에 매일 목욕하더니

존득하게 찰진 가슴, 새침 떼고 앉아서

얄쌍한 몸짓 눈짓으로 두레 밥상 환한 여자

 

3. 미니 밤호박

속은 달콤한 호박 맛 겉껍질은 고소한 밤 맛

노화 억제 성인병 예방, 페놀산 항산화 물질

한 손에 쥘 수 있는 여자, 죽, 찜 모두 짱인 여자

 

4. 겨울 배추

시간이 지나도 쉽게 물러지지 않는

농약 없이도 겨울까지 이기는 여자

얼음 밭자리 까는 여자 신토불이 황토 여자

 

5. 세발나물

얇고 길쭉한 잎 살짝 데쳐 헹군 후

된장 고추장, 물엿 참기름 조물조물 버무리니

개울 안 환해지는 여자 뒷산까지 환한 여자

 

 


 

 

이지엽 시인 / 정오 무렵

 

 

매미가 악을 쓸수록

해는 더 짱짱해진다

 

그걸 보다만 구름이

촤락 촤라ㄱ락 촤락 촥착

비를 뿌렸다

 

모두가 우두망찰

쪼르륵 보드득 빙긋 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지엽 시인 / 면면함에 대하여

 

 

뒷집 까무잡잡한 황정문 어르신(70) 마당에 불쑥 들어선다

 

올해 파 금이 좋아 재미가 좋았지유?

 

그랬지라우 한 마지기 농사에 밭 한마기 살 정도 였응께

 

그라믄 농사도 도시서 샐러리맨 하는 것보다 훨 낫겄소 안

 

그래봐야 뭔 소용이 있간디요

 

한 해 조믄 시 해는 갈아 엎어야하는디

 

하얀 것 누르통통한 것 뒤섞인 계란 한 판을 부끄럽게 내미신다

 

 


 

이지엽(李志葉) 시인

1958년 전남 해남 출생. 본명: 이경영. 성균관대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촛불」 외,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등단. 시집 『씨앗의 힘』 『샤갈의 마을』 『다섯 계단의 어둠』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 시조집 『해남에서 온 편지』 『떠도는 삼각형』 『북으로 가는 길』 『사각형에 대하여』, 성균문학상, 평화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중앙시조대상, 유심작품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계간 《열린시학》 《시조시학》 편집주간,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장ㆍ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