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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령 시인 / 하익조*를 보았다
무염, 청정한 그 백련 봉오리가 쑥 내민 새의 대가리였다니 푸드덕, 푸드덕거리며 물기를 털어내는 둥글고 넓은 잎이 한 방울의 물도 스며들 수 없게 기획된 날개였다니
하익조荷翼鳥,
푸른 날개를 퍼덕이며 수면을 치는 순간을 내게 들키고 말았다 용의주도했던 그 비상의 전조, 본의 아니게 내가 보고 말았다 찰나, 그 전설의 새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연(蓮)으로 돌아가서는 무념, 하였다
* 荷翼鳥 : 빗물을 털어내는 蓮의 잎이 퍼덕이는 새의 날개 같아서, 어떤 새를 상상해 이름을 붙였다,
김은령 시인 / 나의 목수국나무*
목수국나무 아래 죽은 참새를 묻는다
목수국의 휘어진 가지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생, 호미로 구덩이를 파서 묻어 주며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움켜쥔 참새의 가느린 발가락과 목수국 가지와의 거리를 단호하게 끊어주었다 연보라빛 꽃잎 몇 장으로도 가볍게 받아 안을 수 있는 주검에 토닥, 토닥 흙을 다지며 내 생 또한 언젠가는 떨어져야 할 터 그 나뭇가지를 찾다가 이미 오래 전에 지나쳐 왔음을 안다 지나쳐 온 곳을 모르는 척 되돌아가기란 얼마나 낮 뜨겁고 또한 치사한 일이냐
어쩌다 죽음으로도 돌아 갈 수 없는 나의 목수국나무
*목수국: 한 가지에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뒤섞여 피우는 나무
김은령 시인 / 매화나무 바깥에 서다
골짜기까지 휩쓸고 간 태풍 나비에게 굵은 가지 하나를 잃고서도 고요, 고요하던 묘적암 매화나무 찢겨나간 가지의 아픈 자리와 가지를 빼앗긴 몸통의 슬픈 경계에 꽃을 피웠습니다. 매향(梅香) 피웠던 가지의 기억 같은 거, 가지가 있던 자리의 휑한 통증 같은 거 다 내려놓았다는 것이지요 봄 보다 먼저 꽃이 와서 온 몸의 숨구멍이 전부 꽃 피는 자리인 저 매화나무의 말인즉슨 상처도 고요를 지녀야 꽃이 된다는 것인데 빼앗긴 자리와 찢겨진 통증 위에 여전히 광풍이 몰아치는 여기는 아직도 고요의 바깥입니다.
김은령 시인 / 노을1
빈 병과 빈 깡통들이 환생을 꿈꾸는 지상 엄지손가락이 잘려 나간 목장갑과 빈 정부미 포대를 든 서천 할매가 굽은 허리에 매달린 무적의 생을 포대 속으로 집어 넣고 있다. 낡은 슬리퍼에 실린 삶을 꾸준히 밀며 벽돌이 붉은 주택가와 공원 벤치 주위에서 길을 찾던 그녀에게 여전히 분주한 지상이 마침내 지하로 길 하나 내어 주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태양이 붉게 울며 가던 그 저녁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끓고 있는 화덕 앞에서 국수 한웅큼 쥔 채 길 떠난 그녀를 보았다 우리들이 견디는 삶의 서편을 잠시 환하게 붉힌 노을이었다
김은령 시인 / 능소화는 또 피어서
저것 봐라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슬쩍 담 타넘는 품새라니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 능소凌宵 능소凌宵, 아무리 우겨보아도 결국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운명이면서 다시 염천을 겁탈하는 꽃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누대의 습생 -시집 『잠시 위탁했다』 (문예미학사, 2018)
김은령 시인 / 패목牌木
나무는 아버지 무덤가에 있다 어찌 보면 여윈 팔뚝 같고 어찌 보면 미처 수습 못한 파묘 속 정강이 뼈 같은 나무의 가지는 궁벽한 몰골의 동질감을 내세워 아버지와 내통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오래 내통하다 한 계절을 빌려 몸짓으로 오는 나무의 꽃은 나에게 한 번도 들킨 적 없는 아버지 울음 같아서 명치가 꽉 막히고, 불 꽃 같아서 심장이 데이고 급기야 곤죽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나도 그 붉은 배롱나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아무에게도 들킨 적 없는 내 울음을 아래로, 아래로 흘러 보내 아버지에게로 간다
김은령 시인 / 아름다운 것들의 행방
태극문양을 새긴 눈과 용의 발톱과 정수리의 높고 붉은 볏, 황금빛깔의 날개와 꼿꼿이 치켜든 꽁지의 검은 깃! 위풍당당, 아름다운 자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어서 무리들 중 애지중지하였던 수 닭 한 마리 오늘 잡아먹었다 암흑의 끝으로 비로소 빛이 다가오는 그 시각 여명을 부르던 훼치는 소리, 그 생체 법칙의 소리는 나와 이웃들의 단잠을 방해하였으므로 죽임을 당했다 빛과 어둠 두 세계의 가장 끝자락이 겹치면서 변별 되는 순간마다 양 극단이 충돌하지 않고 자리바꿈하는 이쪽과 저쪽의 접점에서 목이 터져라 제 역할에 열중하였던 닭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 하였겠냐 만은 이미 우리는 법칙 따윈 거스른 지 오래 우주 만물이 본생의 법칙을 고수한다는 건 이 시대엔 비명횡사의 길
도처에, 본생인 제 몸이 말하는 법칙 거스르지 못하고 지켜온 것들의 비명횡사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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