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선주 시인 / 책冊의 화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고선주 시인 / 책冊의 화형

고선주 시인 / 책冊의 화형

 

 

 더 이상 책冊에 신뢰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큰맘 먹고 해독한 이후가 문제였다 내 가슴에 화가 있고, 불이 있고, 원망이 있고, 위염이 있고,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고, 결정적으로 역류성 식도염이 있다 항문을 통한 배설을 점점 잊어간다 먹어도 먹어도 역류한다 소화되지 않은 날들이 뿜어져 오르는 어느 오후 바람마저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부어 있고, 발을 떠난 신발은 기절한 채 엎드려 있다 날마다 해독된 글자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꽃 같은 세상 기도하지 않기로 했다 해독되지 않은 것들의 군림이 있을 뿐이다 책장은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한 페이지가 놓여 있다 그날 이후 책을 집어들지 않았다 소화불량의 일상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시집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걷는사람, 2022)에서

 

 


 

 

고선주 시인 / 간장의 이면

 

 

간장에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자

간장종지 한가운데

둥근 달이 떠올랐다

 

간장은 어둠을 붙잡았고

참기름은 달을 붙잡았다

 

바로 섞어 보았다

어두운 밤이 고소해졌다

 

 


 

 

고선주 시인 / 집 없는 집에서 살던 날의 단상

-허기진 조망

 

 

한참 올라야 나오는 집, 하루하루 더욱

가팔라지는 삶을 알았던 것일까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일상도 서러운데

산동네 집으로 귀가는

쓰드쓴 까나리액젓 한입 들이킨 듯하다

 

어떤 이는 대충대충 걸어도 당도하는 집이건만

나는 등산을 하다시피 오르고 또 올라야 집에 들 수 있다

이미 한낮에 직장에서 오르고 또 올라서

오늘은 더 이상 오를 곳 없는데

 

습한 날 골목에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물기 젖은 장작 태울 때 나는 매캐한 연기 닮았는데

사는것이 지독할수록 냄새가 비례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집으로 가는 골목, 날파리 떼가 홀로 서 있는

전봇대 희미한 가로등 옆에서 웅웅거린다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강렬하게 살아 있다는 것,

날마다 죽고싶다고만 외쳐댔다

 

시멘트로 닦인, 단단한 골목길

여섯 살 때 사촌 동생이 큰집에 놀러 온다고 기었던 그 길

먼 훗날 삶은 조심조심 내디디며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기역자로 꺾이는 골목 끝자락

파란색 대문을 열면 우리가 세들어 사는 한옥집

주인집은 뒷집이고, 세입자인 우리는 앞집이었다

밥이 나오지 않는, 허기진 조망권만이 주어졌다

 

주름살 깊게 패인 부모는 일찍부터 가파른 삶을 타며

뭐가 그리 좋았을까

부글부글 끓었을 마음 가라앉히며 그래도 웃었다

 

-시집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 걷는 사람

 

 


 

 

고선주 시인 / 무좀

 

 

세상이 갈수록 가렵다

 

비누로 씻어내고, 소주와 식촛물에 담가도

발에 견고한 집을 지은 무좀균들은

도무지 방을 뺄 생각이 없다

 

전셋값이 너무 오른 데다

물가와 교육비까지 올라 먹고 살기도 힘들고

삶에서 발을 아예 빼든가, 배짱이다

 

긁으면 생채기만 남기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사건들

 

간지럽다 간지럽다

간지러워서

정말

죽을 맛이다

 

 


 

 

고선주 시인 /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휴대폰 받을 때마다

먼저 불평의 말들을 흘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내는 것도

벨이 사르르 꺼질 때까지

느그적 느그적 거리며

통화를 터치한다

그에게는 연결이 또 다른 버거운 세상이었을까

여보세요

누구요

그는 특정하지 않은 사람만 넘친다

몰라요

아닌데요

친절하지 않아서

그도 친절하지 않은 일상만

여기저기 버짐처럼 얼굴에 피어있다

도무지 연결되지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온 사람

우주를 제 멋대로 돌리고는 손을 탈탈 털어내던 사람

 

꾸부정 꾸부정 걸어

빛 홍수가 난

열차역 벽에 기대앉아

낡은 삶 하나를 다독이는 것이었다

아마 그는 그림자였을까

 

벽화에서 보았다

달라붙어 활짝 웃는 그를

 

벽에 기대앉았지만

그는 결코 기대지 못했고

다만 그의 등 뒤에

가만 놓아둔 세상

 

오늘 밤

그의 휴대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도 방전된 삶을 즐기는 걸까

 

 


 

 

고선주 시인 / 밥알의 힘

 

 

아이가 흘린 밥알 하나

흐들흐들한 저 가운데

세상의 무게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다

 

아이가 먹다

흘린, 유들유들한 밥알들

아이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러나 눈 찔끔 감고

마음의 물기까지 말린다

 

눈물을 아는 것 아니냐

그 눈물 너머 단단한 삶이 놓여 있는 것을,

 

어느 날 무심코 아이가 흘린 밥알을 밟았더니

가는 아픔 하나가 머리끝까지 잽싸게 오는 것이다

 

뼈만 앙상해진 밥알 하나

사느라 고열에 시달린 지난 시간들 뉘여

한 생애 거둘 새도 없이

막 풍장風葬을 끝내고 있는 것이다

 

-시집 『밥알의 힘』에서

 

 


 

 

고선주 시인 / 무서운 입

 

 

혓바닥도 없는 놈이

입을 벌렸다

출렁거리는 호수의

밑바닥 드러날 때까지

마셔버리겠지만

아껴서

나눠서

쪼개서

들이부었다

 

캔에 호수를 담았다

어찌나 마셔보고 싶던지

냉동창고에서 꺼내

뚜껑을 따는 순간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호수가 넘쳤다

 

평생 홍수에 맞닥뜨린 삶,

BTS(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처럼

쩔었다.

 

 


 

고선주 시인

1967년 전남 함평 출생. 199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계간 《열린시학》, 계간 《시와정신》 등에 시와 평론 발표하며 문단 활동. 시집 『꽃과 악수하는 법』 『밥알의 힘』 『오후가 가지런한 이유』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 공저 『광주문학지도1』. 광주전남작가회의 사무처장과 이사 역임, 광주대와 호남대, 광주여대, 동강대 등에 출강. 현재 광남일보 문화특집부장과 월간 전라도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