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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시인 / 산굽이 돌아오다가
함양계곡 옛 선비들 다투어 지어놓은 정자들 둘러보다가 시인 묵객들 거쳐 간 천하절경 두루 돌아보다가 작으나마 내 마음속 정자에도 현판 하나 달아야지 하고 마음 정했다
몇 년째 나 혼자 지어놓고 맘속으로만 부르던 쉴 휴休, 산굽이 연연, 휴연정休연亭, 어때? 몇 번이고 내가 나에게 묻던 뫼 山 변에 입 口와 달 月이 합성된 한자어.
산기슭의 나에게 이윽히 손 내밀고 말을 거는 저 달, 옥편에만 있고 상용한자에 없는 산굽이 '연'자를 굳이 고집한 건 그냥 내 맘이다.
검정 목판에 예서체 흰 글자 돋을새김으로. 붉은 낙관은 작고 또렷하게.
김현지 시인 / 여명黎明
그대가 오늘도 나를 지나가네요 돌아도 보지 않고 그냥 가네요 그대 그렇게 무심히 나를 또 지나가 버렸으나 내 눈부심을 한사코 지워버렸으나 나는. 날마다 내게로 다가오는 그대를 봅니다.
김현지 시인 / 참 사랑은 백치 같아야
그 마음속 물샐틈없는 사랑이면 온다 그 마음 명경같이 맑으면 기어이 온다 잊지 않았으면, 잊히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꼭 온다 마음밖에 사립문 열어놓고 가슴속 복사꽃 이지러질 때까지 백치처럼 아둔하게 춘향이 마음처럼 일편단심이면 온다 그래, 그래, 그 마음 천지 간에 그대로 죽어도 한마음이면 그 사랑 다시 온다
김현지 시인 / 연어일기
나는 다시 북상해 가리라 수만 능선을 돌아 불던 바람 밤새 꿈길을 흔들더니 푸름한 어둠 뚝뚝 자르며 실비 오는 소리
산이 뚫린다 가슴 속 가로누운
터질 듯 엉켜 있던 만삭의 말들 갯벌에 쏟아 내고 흐르는 눈물 물비늘로 닦으면 새벽비로 발 씻은 강이 하얗게 몸을 일으킨다
내 길은 강물을 따라 아침을 열고 켜도 없이 흩어져 뒹굴던 기다림의 시간들이 디딤돌로 놓인다, 곧게
잊어야 하는 것 가누어야 하는 것 모두 추슬러 세워 역류해 가리라 나는
번뜩이는 바다 돌섬의 그늘 박차고 천리길 정수리로 가늠하며 한 발 또 한 발 차고 어두운 강의 속살을 헤치고 나가자
갈바람에도 옥빛 물이 들던 감내천 아득한 여울까지 힘차게.
김현지 시인 / 감씨 안에 고향이 있었네
오라버니 올해도 단감을 보내셨군요
반질반질 윤나는 주황빛 골진 몸피를 자르면 칼금 끝에 묻어 나오는 작은 감나무 한 그루 단물 고이는 입안 하이얀 감나무 촉 하나 입에 물고 감씨 안의 내 고향 저 감들이 걸어온 길 되짚어 고향으로 갑니다
비뚤비뚤 경계를 이루는 돌담들이 낮은 초가들 받치고 있는 초저녁의 좁은 골목 안 환히 호롱불 밝힌 창호 문 앞에서 손 그림자 놀이하던 어린 오누이와 헌 양말 기우시는 어머니의 야윈 손목과 마당가엔 아버지 심으신 키 낮은 감나무,
발그레한 감의 속살 들여다보며 가슴 안이 온통 환해지는 날 오라버니 올해도 까치밥 서너 개 남겨 두었겠지요.
김현지 시인 / 테이블 마운틴․1
로라이마로 가자 사흘,나흘,닷새…… 그쯤의 낮과 밤은 길 가운데 두어도 되겠다
가던 길 잠시 비껴두고 둥근 도시락 한 통 싸 들고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배낭속의 사과 한 알 꺼내 먹는 거야
그리고 남은 사과 씨 대여섯 개 테이블 한 가운데 심고 오는 거야
어떤가?신나는 가을 소풍,
내려다보이는 사바나와 구름 폭포는 덤일 거야
김현지 시인 / 테이블 마운틴․2
로라이마로 가서 비비 원숭이랑 사향고양이의 꼬리를 유심히 바라봐 밀림에 오래 살았지만 그 살랑거리는 꼬리는 항상 외향성이지
물의 어머니, 는 너무 많아 어느 쪽에 안겨도 모성을 느끼지 “잃어버린 세계”는 이미 그곳에 없었어
국기가 참 아름다운 나라 빨강 노랑 초록…… 실버트리 빽빽이 길을 여는 로라이마에 가면 케이프몽구스는 모른 척 지나쳐야 해 마음을 주면 길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냥 설렁설렁 걸어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거야 거기 삥 둘러앉아 손뼉 치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한나절 놀다 오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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