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현지 시인 / 산굽이 돌아오다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김현지 시인 / 산굽이 돌아오다가

김현지 시인 / 산굽이 돌아오다가

 

 

함양계곡 옛 선비들

다투어 지어놓은 정자들 둘러보다가

시인 묵객들 거쳐 간 천하절경 두루 돌아보다가

작으나마 내 마음속 정자에도

현판 하나 달아야지 하고 마음 정했다

 

몇 년째 나 혼자 지어놓고 맘속으로만 부르던

쉴 휴休, 산굽이 연연, 휴연정休연亭, 어때?

몇 번이고 내가 나에게 묻던

뫼 山 변에 입 口와 달 月이 합성된 한자어.

 

산기슭의 나에게

이윽히 손 내밀고 말을 거는 저 달,

옥편에만 있고

상용한자에 없는 산굽이 '연'자를 굳이 고집한 건

그냥 내 맘이다.

 

검정 목판에 예서체 흰 글자

돋을새김으로.

붉은 낙관은 작고 또렷하게.

 

 


 

 

김현지 시인 / 여명黎明

 

 

그대가 오늘도

나를 지나가네요

돌아도 보지 않고

그냥 가네요

그대 그렇게 무심히 나를 또 지나가 버렸으나

내 눈부심을 한사코 지워버렸으나

나는. 날마다

내게로 다가오는 그대를 봅니다.

 

 


 

 

김현지 시인 / 참 사랑은 백치 같아야

 

 

그 마음속 물샐틈없는 사랑이면 온다

그 마음 명경같이 맑으면 기어이 온다

잊지 않았으면,

잊히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꼭 온다

마음밖에 사립문 열어놓고

가슴속 복사꽃 이지러질 때까지

백치처럼 아둔하게

춘향이 마음처럼 일편단심이면 온다

그래, 그래, 그 마음 천지 간에 그대로 죽어도

한마음이면 그 사랑 다시 온다

 

 


 

 

김현지 시인 / 연어일기

 

 

나는 다시 북상해 가리라

수만 능선을 돌아 불던 바람

밤새 꿈길을 흔들더니

푸름한 어둠 뚝뚝 자르며

실비 오는 소리

 

산이 뚫린다

가슴 속 가로누운

 

터질 듯 엉켜 있던 만삭의 말들

갯벌에 쏟아 내고

흐르는 눈물 물비늘로 닦으면

새벽비로 발 씻은 강이

하얗게 몸을 일으킨다

 

내 길은

강물을 따라 아침을 열고

켜도 없이 흩어져 뒹굴던

기다림의 시간들이

디딤돌로 놓인다, 곧게

 

잊어야 하는 것

가누어야 하는 것 모두

추슬러 세워

역류해 가리라 나는

 

번뜩이는 바다

돌섬의 그늘 박차고

천리길 정수리로 가늠하며

한 발 또 한 발

차고 어두운 강의 속살을

헤치고 나가자

 

갈바람에도 옥빛 물이 들던

감내천 아득한 여울까지

힘차게.

 

 


 

 

김현지 시인 / 감씨 안에 고향이 있었네

 

 

오라버니 올해도 단감을 보내셨군요

 

반질반질 윤나는 주황빛 골진 몸피를 자르면

칼금 끝에 묻어 나오는 작은 감나무 한 그루

단물 고이는 입안

하이얀 감나무 촉 하나 입에 물고

감씨 안의 내 고향

저 감들이 걸어온 길 되짚어 고향으로 갑니다

 

비뚤비뚤 경계를 이루는 돌담들이

낮은 초가들 받치고 있는 초저녁의 좁은 골목 안

환히 호롱불 밝힌 창호 문 앞에서

손 그림자 놀이하던 어린 오누이와

헌 양말 기우시는 어머니의

야윈 손목과 마당가엔

아버지 심으신 키 낮은 감나무,

 

발그레한 감의 속살 들여다보며

가슴 안이 온통 환해지는 날

오라버니 올해도

까치밥 서너 개 남겨 두었겠지요.

 

 


 

 

김현지 시인 / 테이블 마운틴․1

 

 

로라이마로 가자

사흘,나흘,닷새……

그쯤의 낮과 밤은

길 가운데 두어도 되겠다

 

가던 길 잠시 비껴두고

둥근 도시락 한 통 싸 들고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배낭속의 사과 한 알 꺼내 먹는 거야

 

그리고 남은 사과 씨 대여섯 개

테이블 한 가운데 심고 오는 거야

 

어떤가?신나는 가을 소풍,

 

내려다보이는 사바나와

구름 폭포는 덤일 거야

 

 


  

 

김현지 시인 / 테이블 마운틴․2

 

 

로라이마로 가서

비비 원숭이랑

사향고양이의 꼬리를 유심히 바라봐

밀림에 오래 살았지만

그 살랑거리는 꼬리는 항상 외향성이지

 

물의 어머니,

는 너무 많아 어느 쪽에 안겨도 모성을 느끼지

“잃어버린 세계”는

이미 그곳에 없었어

 

국기가 참 아름다운 나라

빨강 노랑 초록……

실버트리 빽빽이 길을 여는 로라이마에 가면

케이프몽구스는 모른 척 지나쳐야 해

마음을 주면 길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냥 설렁설렁 걸어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거야

거기 삥 둘러앉아 손뼉 치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한나절 놀다 오면 되는 거야

 


 

김현지 시인

1947년 경남 창원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연어일기』 『포아풀을 위하여』 『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 『은빛 눈새』 『그늘 한 평』. 제30회 <동국문학상> 수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 우리말가꾸기 위원회 위원, 한국시인협회회원. 유유동인 향가시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