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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경호 시인 / 결빙을 기다리며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강경호 시인 / 결빙을 기다리며

강경호 시인 / 결빙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견고했던 길

마침내 사라져

북극의 곰들은 빙산 조각을 타고

길 없는 길을 부유하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보라 칠 때

얼음장 위에 이글루처럼 따스한 둥지가 있었다

얼음장 깨지는 소리 불안하게 들으며

길을 가지 못해 물에 빠져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길이 사라진 그곳에

한때 숨어 살던 북극여우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고

북극곰들을 향해

승리한 듯 짖고 있다

 

빙산 조각을 타고 허우적거리는

곰들의 길,

그 길들의 정신이 풀리고

길은 북극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

 

겨울이 되어도 얼음이 얼지 않는 북극

곰들의 비명이 눈 녹은 극지로 메아리치고 있다

 

 


 

 

강경호 시인 /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불로동과 황금동 사이

한때는 수많은 아담과 하와

그들의 천국이었던 골목,

오래 웃자란 무화과나무 번성한

행복여관

 

신세대 아담과 하와들은 번화가로 몰려가고

한낮에도 적막이 흐르는 쇠락한

자물쇠 굳게 채워진 에덴의 길을 걷는다

문득 머리에 무화과 열매 하나

툭, 떨어진다

 

탕자처럼 분탕질로 세상을 떠돌다가

어찌하여 어린 시절 불렀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목에 메이는가

가끔 노인 하나

짓이겨진 무화과 열매를 쓸던 모습 무심하게 바라보았는데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일생이

십자가의 못 박음질처럼 아프게 느껴지는가

 

고목과 한 몸이 되어가는 앙코르와트사원처럼

무화과나무와 하나가 되어가는,

누군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것 같은,

행복여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생애 처음 까닭 모를 울음을 울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강경호 시인 / 봄, 고양이들

 

 

바람만 불어도

난간 위로 도망치는 고양이들

오늘은 햇살 좋은 이른 봄

냉이꽃 피어나는 중국집 담장 밑에서

그 앞을 지나가는데도 무섭지 않다는 듯

누워서 하품하고 있다

검은놈 흰 놈 누런 놈

세탁기 속 빨래처럼 포개져

눈 게슴츠레 지그시 감은 채

무거운 머리 졸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괘씸함에

슬쩍 부아가 났다가

사람이 무서운 짐승이 아니라는 그것들의 생각에

차차 귀엽고 이쁘다는 생각

지난겨울 허기진 채 담장을 타거나

바람부는 난간에서 울어대던 놈들

오늘은 배가 부른지 무심한 것이 고맙다

 

 


 

 

강경호 시인 /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

 

 

영신당靈神堂

이사간 마당 한켠

비에 젖은 부처님 하나

가느다란 미소 짓고 있다

대웅전 높이 앉아있던 존귀한 몸이

오늘은 옆구리가 찢겨진 채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다

부처님은 버림받을 줄 몰랐는데

부처님에 대한 관념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듯

찢겨진 부처님 몸속으로

새들이 스스럼없이 비를 피한다

높고 고고한 지존의 자리에서 내려와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

철없는 나를 닮았다

 

 


 

 

강경호 시인 / 엿기름

 

 

어머니의 일생은

키우지 못할 푸른 싹을 내미는 것이었다

언제나 햇볕에 자신을 내다놓고

쭈글쭈글 늙어가는 것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부쩍 늙어갔다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맷돌에 갈면

흰 뼛가루가 흘러내렸는데

키우지 못한 푸른 싹이

식혜가 되고 단줄이 되었다

팔순이 넘었지만

더 마를게 있는지

베란다에 자신을 널어놓고

말랑말랑 말라간다

요즘들어 비쩍 마른 몸에

커다란 젖이 퉁퉁 불어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어미개처럼 단내가 난다

 

-<불교문예> 2011년 가을호

 

 


 

 

강경호 시인 / 우포늪, 그 영원의 처소

 

 

저것이 영원의 처소란 말인가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

1억4천만 년 전의 태고 위로

안개 속의 늪을 건너보지만,

늪에서 만나는 개구리밥과 가시연....

수많은 새떼.

 

오늘 우포를 보고 가지만

늪의 바닥에 켜켜이 쌓여있는

올 퇴적된 햇빛과 바람과 공기와 말씀들,

누가 우포늪을 보았단 말인가

 

늪은 낙동강 한 켠으로

은밀하게 비켜 앉아

시간을 외면한 채 제 안으로 깊어지고

나는 강물처럼 흘러 저물어가는데

 

한때 공룡이 풀을 뜯던

그때 그 원시로 남아

그저 견고한 침묵으로 썩지 않는 속 깊은 우포늪.

왜 자꾸만 마음이 그 수렁으로 빠져드는가.

 

 


 

 

강경호 시인 / 평화

 

 

조상이 절벽을 잘 타던 뒷발차기 명수 염소가

두 뿔로 불도저처럼 거위를 몰면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지상을 내달리던 거위가

밥주걱 같은 주둥이로 맞받아친다

만나면 싸우는 것이 일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놈들이

누가 집에라도 오면 제 영역을 지키겠다는 건지

뿔과 주둥이를 세우고 막무가내로 들이받는다

이제는 절벽도 타지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하는놈들

실은 절벽에서 내려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지상에서 살만해서일까

생각 끝에 한우리에 살게 했더니

하루 내내 두 패가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제는 한 밥그릇에서

함께 밥을 먹을줄도 알게 되었다.

 

 


 

 

강경호 시인 / 상처를 위로하다

 

 

강아지 한 마리,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쫓아와

자동차가 사라질 때까지 짖는다

 

언젠가 집을 벗어나 찻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한 마리는 죽고

어쩌다 살아났다는 강아지 한 마리

실은 자동차가 저승사자처럼 무섭지만,

세상의 모든 자동차는 적이어서

강아지가 짖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열세 살 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불량배네 집 앞으로 지나지 못해

멀리 돌아가곤 하였던 기억

그러므로 상처입은 개가 짖는 것은

최대의 용기지만

나는 강아지보다 못한 나약한 미물

 

강아지가 있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자동차를 멀리 두고

다리 다친 강아지를 쓰다듬곤 한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아직도 쓰라린

내 상처를 위로하곤 한다

 

 


 

강경호 시인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77년 월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 『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 『휘파람을 부는 개』 『함부로 성호를 긋다』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등. 2010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