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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주송 시인 / 공터의 논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이주송 시인 / 공터의 논법

이주송 시인 / 공터의 논법

 

 

 공터에 첨부하는 방식으로 데이지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다 그렇다면 공터는 한 마디 바깥을 달아놓은 셈 첫 번째 손짓을 돌아 데이지 꽃다지를 지나치니 이런, 그 많은 구구는 어디로 갔는가 소낙비와 눈송이를 담론으로 삼았던 깡통차기나 고무줄놀이는 더이상 양산되지 않는다 훤칠한 건물의 모퉁이가 서성거리다 그림자를 공연히 걷어찰 때 그곳엔 망치 소리나 엇나간 못 같은 것이 어제 쪽으로 휘어 있다 한 번 호명된 공터의 소속은 재사용할 수가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잡초의 은폐를 믿고 오랜만에 찾아간다거나 근처를 불러 모으는 일은 난감하다 버려진 곳이 받아낸 풍경으로 자늑자늑해질 때 계절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터에 활용된다 식물은 겨울 동안 스스로 질문이 되어간다

 

 


 

 

이주송 시인 / 각주

​거대한 나무일수록

그 밑에 달린 고요는 명료하다

느티나무 평상이 출처가 된다면

접힌 오전과 오후는 한여름에 인용된다

유연한 풀 위에 햇살의 지분과

초록의 이면이 간결하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은

크고 우람한 원문의 수령을 묻는다 쓰다듬는다

수피 안쪽으로

거칠고 굵은 내력이 기재되어 있다

삼백 년이란 짐작으로만 닿을 수 있는 오늘인가

나무가 사람의 근원에서 가지를 내릴 때

양팔 벌려 난생처음 한 아름이 되어 본다

뒷면에는 벼락을 삼켜 갈라진 상처가 있다

그 곁 참조 같은 옹이에 대해

쉼표일까 마침표일까 대조해 보는 동안

검은지빠귀 한마리 푸득푸득 솟아오른다

검정 속에 검정이라니

나무는 역설까지 품고 있다

여름 내내 느티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밑줄을 긋곤 한다

이때의 각주는 그늘보다 더 진실하다

잎사귀와 잎사귀 사이 일렁이는 햇살이

파란 맥박처럼 뛰고 있다

​​

<열린시학> 2022년 겨울호

 

 


 

 

이주송 시인 /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

 

바위 속에서

나뭇잎의 잎맥인 듯 빗살무늬인 듯

오래된 뼈가 걷고 있었다

참빗을 닮은 한 벌의 뼈

초식이었던 뿔공룡은 일억 일천만 년 동안

바위 속으로 스며든 빗물이나

몇 번의 지각이 이동하는 소리로 연명했다

살점과 내장과 표피를 버리고 온전한 바위가 되어

마지막을 증언하고 싶었을 거다

천적이 없는 단 하나의 계절 속에서 그 오랜 진화의 시간

단단한 근육과 푸른 이끼의 털을 갖고 싶었을 거다

그러다 광물의 구(球)속에서도 부화의 시간은 다가와

화석에게도 통점이 도졌을 거다

갯벌의 어패류들이 조금씩 달을 뜯어먹는 동안

공룡은 부리주둥이가 뭉툭해지도록

태초의 서식지를 감각했을 것이다

한 겹 두 겹 더위와 추위를 껴입고

돌가루를 되새김질 하며 온 몸에 밴 울음을

초원의 저물녘에 방류할 때를 기다리며

바위 속까지 헤엄치고 있는 신경배돌기를 방치했을 것이다

부러진 골반 뼈로 백악기의 유전자를 복원하고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의 낯선 이름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아직도 공룡은 진화중이다

크고 넓은 바위 속에는

부화를 꿈꾸는 공룡들이 은밀하게 살고 있다

*2008년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에서 발견된 뿔공룡화석

 

― 제 7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대상

 

 


 

 

이주송 시인 / 물의 악보

 

 

징검다리를 건너다 간격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건 물의 반올림

잠시 헤어진 쪽을 천천히 바라보는,

당신과 나를 위한 다카포라고 떠올렸어요

 

물속을 들여다보다 알았네요

이렇게 맑은 템포도 있다는 걸

물은 틈을 몰라 건너뛸 일이 없어요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악장을 타고 하류로 갈수록 웅장해져요

 

때론 엇박자로 휘청거리다

추락할 수 있음을 알았어요

나지막한 오해 몇 개는 물속에 잠겨 있어서

잇단음표로 팔짝 건너기도 했죠

 

간격 앞에서 난처했던 일 많았어요

당김음의 감정도 역할의 터울일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낮과 밤

늘 빠져 살 수밖에 없죠

 

어제보다 디딤돌이 하나 더 늘었네요

못갖춘마디가 나를 엇디딜 때면

어느 쪽도 아닌 딱 중간에 떠 있는

체공을 생각해요 아니,

한꺼번에 넘어질 수 있는

순간을 건너다봐요

 

좁게 흐르는 물일수록 소리가 크게 들려서

띄엄띄엄, 우리가 솟고 있어요

 

 


 

 

이주송 시인 / 비를 틀어 놓고

 

 

비를 틀어 놓으면

몇 개의 주파수가 생긴다

 

오래전에 죽은 애인이 다이얼을 돌려 내게 맞춰 왔다

잡음이 들어가고 소리가 찌그러졌으나 이내 빗줄기 사이로 전파가 흩어졌다

 

남극이나 북극 같은 곳에서

라디오를 틀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신호는 바로 얼어 버리고

빙하 속엔 셀 수도 없는 헤르츠가

갇혀 있을 것인데

 

어느 나라에선 빗소리 틈에서

씨앗들이 발아하고

수생 식물들이 자란다고 한다

 

비를 틀어 놓으면 반나절쯤은 꿈과 생시가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섭씨들이 연결을 시도하면 태어나는 중이거나 목숨이 할당되는 중이라고,

또 한바탕 비 내리는 소리를 서둘러 잠그는 것이다

 

단절된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기념하는 일은

한 사람을 구축하는 데 드는 광역대에

접속하는 것이라는데

 

이중창을 오래 들여다보면 마주 보던 입김으로 급히 써 내려간 모호한 흘림체가 남아 있다

잠재된 예각이 둔각으로 열릴 때까지 지저귀던 입술들

 

안부를 묻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빗소리가 새 주파수를 튼다

그런 날씨면 나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주송 시인 / 중심의 발견

 

​어제 만난 직립이

오늘도 그곳에 있다면

중심의 확고한 주관입니다

사람은 이미 무수한 중심을 수집하고

터득하고 수소문한 끝에

다량의 목록을 갖추고 있습니다

몇 번 넘어질 뻔한 일에도 일련번호가 붙어

습관이 중심을 가눌 수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 집을 짓는 일이란

중심에다 창문을 내고 신발장을 들이고

굴뚝을 세우는 일입니다

거기서 연기가 피어올랐다면

사소한 중심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방금 떨어진 빗방울이 파문을 실행하고

중심을 버리고 멀어지는 일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꽃들도 향기의 둘레로부터

중심을 갖습니다 그 최소한의 거리로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물은 흐르는 중심, 연기는 흩어지는 중심,

돌은 무게의 중심입니다

그중에 단 한번도 움직이지 못한 돌이 있다면

중심의 퇴화일 것입니다

중심엔 깎이고 덧대어지는 하루가 있습니다

학교로 일터로 부리나케 나섰던 가족이

집을 중심으로 돌듯

식탁은 우직하게 제자리를 지킵니다

무엇인가 흔들린다면 그건

중심을 모으는 중일겁니다

-시집 『식물성 피 』에서

 

 


 

 

이주송 시인 / 폭설의 배차시간표

​밤새 내린 폭설로 길들이 산간을 두절시킨다

세상 미끄러운 일들도 길을 끊고

며칠째 고립되기도 한다

길이 멈추니 멀고 가까운 대부분이

다 길의 속사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내일 날짜를 고르던 이웃집 노인도

잠시 흰 눈 같은 잠에 빠졌다

뒤척이다 이쯤과 저쯤이

일기一期였다고 돌아눕는다

이런 날 움츠러드는 눈금이 불안하다

보일러의 빨간바늘은 다독이다보면

며칠은 더 견딜 것이다

정갈하게 나열된 목적지들은

하루쯤이나 며칠 뒤로 두서없이 미루어졌다

뛸 생각이나, 허겁지겁 걸어야 하는 일들도

잠시 주춤, 기울어진 쪽으로 중심을 잡는다

눈이 오면 동그란 소리는 쉰다

기다려야 할 밤은 연장된다

폭설의 배차시간표,

털털거리며 골목을 여닫았던

현관 앞 낡은 스쿠터도 열쇠를 반납했다

마을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디쯤에선 제설차가 눈 쌓인 길을

길 밖으로 퍼내고 있다는데

길이 없는 나무들만 풀썩, 눈을 털어내며

간격을 지키고 있었다

 

 


 

이주송 시인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 『식물성 피』. 2019 제7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