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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이안 시인 / 아레카야자의 겨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김이안 시인 / 아레카야자의 겨울

김이안 시인 / 아레카야자의 겨울

 

 

칩거의 겨울,

댑싸리 같은 꽃대에 너는 또

노랗고 둥근 말들을 달기 시작했다

 

좁쌀을 닮은 네 말의 한계는

벽과 바닥에 닿아있지 않다는 것,

정화와 환기는 너의 본능일 거야

 

겨침없는 회유의 길,

해부와 분석을 거부하며

갇힌 말들은 섣불리 뛰쳐나갈 궁리를 한다

 

자꾸 구석을 찾는 나에게 너는 또 채근해대겠지

배꼽 같은 공들을 대책 없이 던지며

공중으로 차올리며

 

톡·톡·톡·톡·

흩어져 구르는 공들을 줍는 사이

겨울 해가 노루꼬리보다 짧아질 거야

 

방 안의 떠도는 물 알갱이들처럼

메마른 숨들을 적시며

적시며

 

-『문학의식』 2016년 겨울호

 

 


 

 

김이안 시인 / 나의 노래는

 

 

겨우 미내가 낀 이른 저녁 바다에 당도했네

팔딱이는 심장의 여음들을 바닷물에 풀어 놓네

울며 잠들었다 깬 어느 낯선 저녁처럼

푸르고 푸르더라

멀고 먼 곳으로부터 귀를 간질이는

싸륵 싸르륵 쌀 씻는 소리

차를 차르륵 돌 이는 소리

해조류 같은 어둑발이 물큰물큰 끼쳐 오는데

밥 먹어라! 아직

날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네

수런거리던 그림자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나하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어둑해진 경계에서 외뿔처럼 웃다가 울다가

찰박이다가

물로 삼은 신발 한 켤레 다 닳고 해질 때까지

 

- <다시문학> 2017 여름

 

 


 

 

김이안 시인 / 식물성을 위하여

 

 

꽃을 말린다

줄기의 그림자는 더욱 견고해졌고

나는 꽃을 묘사하는 일에 서툴렀으므로,

 

지금은

북서풍이 불어오는 계절

 

황사가 자욱한 베란다 창밖으로 휘리릭,

낙엽이 공중을 휘돌아 치며

날아오른다

 

자꾸만 눈이, 코가, 매워진다

뉴스에서는 단지 외출을 삼가고

손을 자주 씻으라고만 한다

 

아랑곳없이 어떤 생물성은

벽 위에다 향기를 거꾸로 매달고

책갈피 속엔 빛깔을 가두며 논다

 

고장 난 시계 바늘에

째깍째깍 흔들리는 시선을 걸어둔 채,

숯이 된 나무들에 대해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꽃!

잠시 숨을 꾹 누르고 하얀 어둠을 덮자

한낮의 통점이 너를 확인할 수 없을 때까지

 

-시집 『제비무덤』 (2019, 시와표현)

 

 


 

 

김이안 시인 / 제비무덤

 

 

무덤을 파헤치자 검은 흙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너의 머리와 몸통은 그렇다 치고, 대체

노란 부리와 발목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흙더미에서 갑자기 검은 날개가

푸드덕 깃을 털며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쏟아져 나온 흙을, 아니

새의 깃털들을

허겁지겁 다시 제자리에 덮어 주었다

 

붉게 피어오르던 노을은 순식간에

검은 먹물 빛으로 바뀌고 아 정말 미안해

파헤쳤다. 묻었다.

 

-이제 제발 내 무덤을 가만히 내버려 둬!

마치 네가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이 괴기한 반복을 멈출 수가 없었어

 

내 몸이 땅속으로 푹푹 꺼지는 꿈을 꿀 때마다

쏟아져 나온 검은 흙들은 매번

허공 위에 새 봉분을 만들고 만들었지

 

열 개의 피 묻은 손톱이 묻힌 봉분 위에서

언젠가 너는 노란 부리로

콕콕 내게 인사를 건네고 있을까

 

-거기 그곳에선 아프지 않니?

 

-시집 『제비무덤』 (시와 표현, 2019)

 

 


 

 

김이안 시인 / 한밤의 베스트셀러극장

 

 

<베스트셀러극장>을 보고 있었어

전화벨이 울렸지

순간의 정적은 길보다 불길 쪽에 가까워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희극보다 비극 쪽에 가까워

그래도 너무하잖아

우리가 즐겨보던 <베스트셀러극장>이었는데

제목은 뭐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전화벨 소리가 일순 성가셨던 것을 보면

분명한 건 클라이맥스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

TV 화면에서 그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안방에선 일가족이 텔레비전을 보다

한밤의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지

장항아리 같은 늙은 여자의 몸이

첨벙첨벙 방바닥을 치며 송두리째 출렁거렸어

엄마와 언니가 후다닥 대문을 나서고

아버지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와중에서도 깜박 잠이 들었지

갑자기 귀청을 때리는 외마디 비명과 울음소리

담뱃재처럼 털려나오는 아버지의 하얀 탄식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도통 꿈이 깨지 않았어

<베스트셀러극장>은 새벽 네 시가 되어도

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지,

극사실적인 것은 마치 허구 같아서

나는 내 배꼽 스위치를 꾹 눌렀어

화면에서 수천만 마리의 나비 떼들이 순식간에

지지직 분가루를 떨어뜨리며 사라져 갔어

망망한 검은 상자 속으로

 

 


 

 

김이안 시인 / 책을 덮다

 

 

당신은 오독했다

 

근거는 미약하다

당신이 간간히 긋고 간 밑줄들

연필이거나 볼펜이거나 혹은 노란 형광펜 자국으로 인해,

 

책 속의 흔적은 오독을 부인한다

-나는 분명히 읽었어!

 

그러나 당신이 읽고 싶은 것을

당신의 취향과 방식대로 읽었을 뿐,

당신은 처음부터 읽지 않았고

끝까지 읽지 않았고 혹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당신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냉정한 당신의 눈을 통해, 나는

시시껄렁하고도 복잡·난해한 나를 읽는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예각이 기척을 하기 시작한다

읽다 만 111쪽 페이지를 접고 나는

책장 구석에 책을 잘 꽂아두기로 한다

당신은 읽히지 않는다

 

더 이상 오독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예각은 무뎌디지 않은 채

단지 우리는 잠시 서로 함구할 뿐,

 

- 《열린시학》(2013 가을호)

 

 


 

 

김이안 시인 / 요오드 세슘비가 내리는 날

 

 

차바퀴에 감기는 빗소리가 촘촘히 그물코를 뜨는 오후

빨래더미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세탁실로 가는 중이네

한 무리의 새떼가 눈앞을 홱홱 스쳐 지나가네

허공에 어지럽게 흩날리는 검은 깃털 몇 개

 

창밖의 어린 연둣잎에 두 눈을 찔리네

나 참, 세탁하러 가는 중이었던 걸 잊었네

수위는 최고조,

세탁· 헹굼· 탈수 무한반복 재생버튼을 누르네

 

세탁조의 강력 모터 소리에 감기는 무색 무미 무취와 거품

오늘은 내가 아끼던 블루진을 헌옷 수거함 속에 버렸네

그래, 그 청바지는 너무 오래 입었어

밑단에 흰 실낱이 죽죽 일어나기까지

 

탈수된 빨래 속에서 물기 채 가시지 않은

깃털들이 묻어 나오네

거대한 원심탈수기에 형체만 남은

새의 깨진 부리와 날갯죽지

 

피어나는 하얀 목련꽃 아래로

얇고 예리한 그늘 한 장이 지나갔을 뿐

놀랍지도 않네

그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하고,

 

베란다 건조대에 부는 그물코 속 바람

시폰 블라우스 한 장 건듯 흔들다 가네

 

 


 

김이안 시인

1968년 충북 옥천(경남 하동) 출생. 본명: 김두란. 2011년 계간 《시평》을 통해 등단. 시집 『제비무덤』. 현재 〈12+ 시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