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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산하 시인 / 연은 소통입니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박산하 시인 / 연은 소통입니까

박산하 시인 / 연은 소통입니까

 

 

꽃은 웃는 게 수행인가 봅니다

 

삼화령, 아직도 생생합니다

눈 오면 선이 곱고

비 오면 환하지요

 

삼짇날 차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람은 바뀌어도

연은 뻗어내려 서출지에 번져

편지를 건넸던 일도 모른 척 그저 웃습니다

 

가을 연꽃대로 피고 지지만

잎은 잎맥으로 넓고 꽃은 꽃대로 높아

사람들은 꽃 따라 미소가 출렁

공감은 구름처럼 번집니다

온통 웃음천지입니다

 

 


 

 

박산하 시인 / 디기탈리스

 

애인이 떠난 며칠 후

꺄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옆구리가 가려워서 긁었다

생각에 생각을 졸이면 마른 웃음이 날 때

꽃을 심었다

 

연둣빛 소리가 났다

푸른 종이 되었다

바람 불 때마다

속주름이 펴진다

간지럼을 탄다

 

옆구리가 가려워진다는 건

단순한 뇌를 가졌다는 거

훅 들어오는 웃음

초롱초롱한

극약도 약인지라

멈춘 심장이 뛰는

칠월엔 웃기로 했다

-시집 <샤갈, 모래톱에 서다>에서

 

 


 

 

박산하 시인 /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1

 해 지고 달 뜨는 것과는 상관없다

 순환, 회전, 무대만이 존재한다

 

 육각형 나사 하나가 내 자리를 지탱한다 투명한 나무들이 밀려온다 누군가 밀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속도로 밀어야 해 잎이 돋고 수맥 돌고 하나의 잎은 또 다른 잎을 밀어내고 한 개의 나사는 또 다른 나사를 엮어내지 시시포스의 선물, 가시에 선혈이 튀기도 하지 살아 있다는 거 생각할수록 살기 위해 그 무대로 뛰어드는 거야 회전은 순종, 블랙홀처럼 빨아 당기지만 튕겨 나와야 살 수 있다는 걸 썩지 않는 소금을 썩게 하고 투명 나무가 뿌옇도록 돌아가게 하지 회전, 그 너머 이빨이 자라지 뇌腦, 심心 그사이 회전 벨트와 몸 사이, 호수에 빠진 금화 세 닢

 

 2

 고니에게 물갈퀴를 돌려준다

 신발을 갈아 신는다 내 몫의 시간이 당도하면

 

 바퀴 달린 상자에서 뿔이 돋는다 거푸집에 석고를 붓듯 딱딱한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뇌수가 흐르는 말랑한 몸. 뇌, 바람, 마음, 노을로 각각 조립된 몸, 간섭 없는 언제나 순종하는 입자가 성근,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는 네 자유가 커질수록 내 자유가 훼손당하는 아니 현재는 1초, 0.1초, 0.001초만이 현재. 촉 닿는 너비만큼 과거가 돼버리는

 바람을 탄다 표면에 깃털이 돋는다 달짝지근한 단백질을 먹고 얼굴은 순간 화석이 된다 그 새의 발이 다음 발자국을 밀어낼 때의 보폭 그 속에 들어 있는 걸 안착하는 곳에 색이 스며들지 수면은 늘 그렇게 일정한 파문만 허용하지 그렇게 몸은 제각각 조각이 나지 적당히 부푼 바퀴가 돌고 점점 얇아지는 나만의 시공. 마침내 성곽, 무너지다.

 

 


 

 

박산하 시인 / 벼리

 

 

밧줄이 쉰다

물을 건진 거리만큼

바다를 물고 있는

수천만 개의 작은 문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나갈 땐 의지대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문을 물어뜯는다

주둥이가 헐고 집게발 삐걱하지만

좀체 열리지 않는다

작은 문을 거느린 큰 문의 빗장

빗장을 놓으면 바다는 헛것

죽음조차 건사할 힘이 없을 때

문은 이미 문이 아닌 것

고물에 걸린 따개비 잘라내듯

수만 개의 문을 자른다

덩그러니 남은 밧줄

그 위로 불개미 한 마리, 먹이를 끌고

나선형 골목을 기어간다

-시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019. 천년의시작

 

 


 

 

박산하 시인 /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들의 동반이 되어가는 며느리

딸이 없으니 딸보다 예쁜데

처음 인사하러 올 때

어디 사는 것 외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들이 좋아한다는데

사소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 모습

눈 맑은 아가씨가 내 가족이

된다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행여 가슴에 금이 갈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신접살림, 서너 달 지나

며느리 전화를 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시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019. 천년의시작

 

 


 

 

박산하 시인 / 슬도에서

 

 

거문고를 뜯는 소리라니

항아리 닮은 포구에서

곰보바위 속에 차있던 물이

목구멍 사이로 빠져나올 때

그 울림이 거문고 소리로 들린다는데

내 귀에는 거문고 소리 들리지 않는다

 

해당화 돈나무가 꽃을 피운 슬도 입구

풀들은 휘어지다 다시 서고

바위틈에 굽을 대로 굽은 해송 한 그루

바다를 빤히 본다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 한 방울 한 방울

때론 빠르고 격하게

때론 느리고 보드라운

바다가 게워낸 울음 속에는

으스러지는 빙하의 울음

소화 못 한 고래의 눈물

물질하는 해녀의 숨소리

선박을 만드는 노동의 땀이

곰보바위 속에 잠시 머물다

빠져나갈 뿐이다

 

  


 

 

박산하 시인 / 사과밭에 고양이가 산다

 

 

달이 할퀴어져있다

사과나무 사이사이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도 생채기 나 있다

바람도 달빛도 생채기가 나 있어서 맛있다

얼음골 사과를 먹을 때는 혀를 조심하라

달콤한 과육 속에 고양이 발톱이 자란다는 걸

주변의 것들을 생채기 낸다

바람이 휜다

비가 꺾여서 온다

소쩍새 울음도 젖어서 온다

매섭게 공중을 갉아대는 소리

생채기 난 달빛이 달무리 져 내린다

가지는 가지끼리

뿌리는 뿌리끼리 깍지를 낀다

달도 제 몸 오그려 등이 휜다

과육마다 굽은 달빛이 내려앉아

폭양에 익은 살들

밤새 꿀이 되기까지

별빛이 얼어서 당도한다

고양이 발톱을 삼킨 사과

향기가 뾰족하다

 

 


 

박산하 시인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 졸업. 2014년 《서정과 현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제5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수상. 2014 『서정과 현실』 신인작품상을 수상. 울산문인협회, 울산시인협회, <詩木>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