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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하 시인 / 연은 소통입니까
꽃은 웃는 게 수행인가 봅니다
삼화령, 아직도 생생합니다 눈 오면 선이 곱고 비 오면 환하지요
삼짇날 차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람은 바뀌어도 연은 뻗어내려 서출지에 번져 편지를 건넸던 일도 모른 척 그저 웃습니다
가을 연꽃대로 피고 지지만 잎은 잎맥으로 넓고 꽃은 꽃대로 높아 사람들은 꽃 따라 미소가 출렁 공감은 구름처럼 번집니다 온통 웃음천지입니다
박산하 시인 / 디기탈리스
애인이 떠난 며칠 후 꺄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옆구리가 가려워서 긁었다 생각에 생각을 졸이면 마른 웃음이 날 때 꽃을 심었다
연둣빛 소리가 났다 푸른 종이 되었다 바람 불 때마다 속주름이 펴진다 간지럼을 탄다
옆구리가 가려워진다는 건 단순한 뇌를 가졌다는 거 훅 들어오는 웃음 초롱초롱한 극약도 약인지라 멈춘 심장이 뛰는 칠월엔 웃기로 했다 -시집 <샤갈, 모래톱에 서다>에서
박산하 시인 /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1 해 지고 달 뜨는 것과는 상관없다 순환, 회전, 무대만이 존재한다
육각형 나사 하나가 내 자리를 지탱한다 투명한 나무들이 밀려온다 누군가 밀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속도로 밀어야 해 잎이 돋고 수맥 돌고 하나의 잎은 또 다른 잎을 밀어내고 한 개의 나사는 또 다른 나사를 엮어내지 시시포스의 선물, 가시에 선혈이 튀기도 하지 살아 있다는 거 생각할수록 살기 위해 그 무대로 뛰어드는 거야 회전은 순종, 블랙홀처럼 빨아 당기지만 튕겨 나와야 살 수 있다는 걸 썩지 않는 소금을 썩게 하고 투명 나무가 뿌옇도록 돌아가게 하지 회전, 그 너머 이빨이 자라지 뇌腦, 심心 그사이 회전 벨트와 몸 사이, 호수에 빠진 금화 세 닢
2 고니에게 물갈퀴를 돌려준다 신발을 갈아 신는다 내 몫의 시간이 당도하면
바퀴 달린 상자에서 뿔이 돋는다 거푸집에 석고를 붓듯 딱딱한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뇌수가 흐르는 말랑한 몸. 뇌, 바람, 마음, 노을로 각각 조립된 몸, 간섭 없는 언제나 순종하는 입자가 성근,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는 네 자유가 커질수록 내 자유가 훼손당하는 아니 현재는 1초, 0.1초, 0.001초만이 현재. 촉 닿는 너비만큼 과거가 돼버리는 바람을 탄다 표면에 깃털이 돋는다 달짝지근한 단백질을 먹고 얼굴은 순간 화석이 된다 그 새의 발이 다음 발자국을 밀어낼 때의 보폭 그 속에 들어 있는 걸 안착하는 곳에 색이 스며들지 수면은 늘 그렇게 일정한 파문만 허용하지 그렇게 몸은 제각각 조각이 나지 적당히 부푼 바퀴가 돌고 점점 얇아지는 나만의 시공. 마침내 성곽, 무너지다.
박산하 시인 / 벼리
밧줄이 쉰다 물을 건진 거리만큼 바다를 물고 있는 수천만 개의 작은 문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나갈 땐 의지대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문을 물어뜯는다 주둥이가 헐고 집게발 삐걱하지만 좀체 열리지 않는다 작은 문을 거느린 큰 문의 빗장 빗장을 놓으면 바다는 헛것 죽음조차 건사할 힘이 없을 때 문은 이미 문이 아닌 것 고물에 걸린 따개비 잘라내듯 수만 개의 문을 자른다 덩그러니 남은 밧줄 그 위로 불개미 한 마리, 먹이를 끌고 나선형 골목을 기어간다 -시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019. 천년의시작
박산하 시인 /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들의 동반이 되어가는 며느리 딸이 없으니 딸보다 예쁜데 처음 인사하러 올 때 어디 사는 것 외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들이 좋아한다는데 사소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 모습 눈 맑은 아가씨가 내 가족이 된다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행여 가슴에 금이 갈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신접살림, 서너 달 지나 며느리 전화를 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시집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019. 천년의시작
박산하 시인 / 슬도에서
거문고를 뜯는 소리라니 항아리 닮은 포구에서 곰보바위 속에 차있던 물이 목구멍 사이로 빠져나올 때 그 울림이 거문고 소리로 들린다는데 내 귀에는 거문고 소리 들리지 않는다
해당화 돈나무가 꽃을 피운 슬도 입구 풀들은 휘어지다 다시 서고 바위틈에 굽을 대로 굽은 해송 한 그루 바다를 빤히 본다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 한 방울 한 방울 때론 빠르고 격하게 때론 느리고 보드라운 바다가 게워낸 울음 속에는 으스러지는 빙하의 울음 소화 못 한 고래의 눈물 물질하는 해녀의 숨소리 선박을 만드는 노동의 땀이 곰보바위 속에 잠시 머물다 빠져나갈 뿐이다
박산하 시인 / 사과밭에 고양이가 산다
달이 할퀴어져있다 사과나무 사이사이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도 생채기 나 있다 바람도 달빛도 생채기가 나 있어서 맛있다 얼음골 사과를 먹을 때는 혀를 조심하라 달콤한 과육 속에 고양이 발톱이 자란다는 걸 주변의 것들을 생채기 낸다 바람이 휜다 비가 꺾여서 온다 소쩍새 울음도 젖어서 온다 매섭게 공중을 갉아대는 소리 생채기 난 달빛이 달무리 져 내린다 가지는 가지끼리 뿌리는 뿌리끼리 깍지를 낀다 달도 제 몸 오그려 등이 휜다 과육마다 굽은 달빛이 내려앉아 폭양에 익은 살들 밤새 꿀이 되기까지 별빛이 얼어서 당도한다 고양이 발톱을 삼킨 사과 향기가 뾰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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