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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원숙 시인 / 회복의 나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7.
이원숙 시인 / 회복의 나라

이원숙 시인 / 회복의 나라

 

 

목마른 대지로부터

질퍽해진 햇발의 밀어가 도착한다

굳어진 땅을 다독이는 해비 오는 소리에

마른 가지에서 움을 틔우는

생명나무 빛을 단다

숨은 그늘을 지나온 꽃등이

붉은 속살을 감추는 자리

 

초야草野에 묻힌 묵시의 나라

에스겔 골짜기에는

푸른 지붕을 이고 살아가는 예비자

신들메도 풀지 못한 채

가난한 자의 허기를 벗 삼아

샘을 파고 왕의 정원을 가꾼다

방초동산의 선율은 파아란 새순처럼 해맑아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하고

축복의 다리를 높이 달고서

파랑새를 찾아 떠난다

기약 없는 불신자의 냉소가 날아드는 텃밭에서

스스로 깨어날 씨앗을 심는 미명의 새벽

 

낮은 울타리에 깃드는 안식은

작은 정원에서 나와서

통치자의 비밀이 열리는 문으로

시린 땅 속을 뚫고 뜨락에 흐르는 아지랑이

지평선을 돌아 나오는 아침 해가 빛나고 있는 시온

어느 봄날, 도래하는 회복의 나라로부터

 


 

이원숙 시인 / 방어

 

 

동해횟집 수조 속 대형 방어 한 마리

큰 몸집 때문에 오늘도 아프다

다만 살아 있으므로

파도를 기억하는 지느러미의 본능으로

가볍게 옆구리를 흔들었을 뿐인데

주둥이가 자꾸 앞 유리벽을 찧는다

이렇게 좁은 데로 끌려 올 줄 알았다면

자라지나 말걸!

후회하듯 찧고 또 찧는다

찢어지고 피 맺혀도 태연한 눈빛

바다로 돌아갈 꿈이 남아 있는 한 울지 않겠다고

이게 다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항변하듯 찧고 또 찧는다

이렇게 된 바에야 실컷 살아나 보자고

쿵, 쿵, 쿵쿵쿵

부릅뜬 눈으로 통증을 삼킨다

주둥이 끝이 너덜너덜해질 즈음

횟집 남자가 느럭느럭 뜰채를 들고 다가온다

후진을 모르는 방어,

달아난다는 것이

또 주둥이를 유리벽에 쿵쿵쿵

-시집 『거미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원숙 시인 / 어머니가 있는 저녁

 

 

부뚜막은 자궁 속 같은 아궁이를 가지고 있었다

태초부터 불씨를 품고있던 곳

어머니의 시간이 말라가고 나의 내일이 만들어지던 곳

몸을 맡기면 얽혀 있던 생각들이 태동을 시작하고

느슨해진 이야기가 젖은 감정을 말렸다

 

솥뚜껑 위 하양 양말, 나른한 운동화가 발을 뻗고

시래기 산나물 북어 호박꽃이가 모빌처럼 빙빙 돌아갔다

열무김치 나박김치 총각무 걸터앉아 익어가던 부뚜막

어머니의 생도 쉰내가 나도록 발효되어 갔다

 

부뚜막으로 내려온 저녁노을이 알맞게 구워지는 사이

끼니때마다 시름들을 밑반찬으로 달달 볶아내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뒤집어 놓는 일상을 우려내어

인생의 참맛을 즐기는 레시피를 개발하셨다

부뚜막은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를 들려주었다

 

탯줄로 이어진 배꼽시계가 돌아가는 부뚜막

허기진 마음을 두드리는 문이 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방이 방에게 저녁이 아침에게

말을 걸어주는 지친 어둠을 한 짐 지고 돌아오는 골목길

가난한 담벼락에 기대앉은 가로등 그림자가 흔들리고

허기진 저녁이 몰려왔다

 

저녁의 감정을 요리하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는 무엇으로 허기를 채우셨을까

어머니의 부뚜막에 들어서면, 짊어졌던 칠흑 같은

저녁이 다시 환해졌다.

 

 


 

 

이원숙 시인 / 숨바꼭질

 

 

한 달을 누워만 있던 아버지

어린아이가 되었나, 숨바꼭질 하자시네

탯줄같이 휘늘어진 링거 줄 떼버리고

흰 시트 속으로 엇, 숨어버렸네

 

술래만 술래만 하던 아버지

이번에는 나더러 술래 하라시네

 

아버지는 나빴다,

눈 가리고 열까지 다 세지도 않았는데

이제 숨어도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디 잡아볼 테면 잡아보라며

하늘공원 화장장 불 속으로 뛰어들었네

 

저기 저 흰 뼈가 아버지일 리 없지

고개 갸우뚱거리는 사이에

백자 단지 속으로 재빨리 숨어들었네

 

하얗게 센 머리칼도 헐거운 옷자락도 보이지 않지만

앞세운 커다란 영정 사진

아버진 줄 다 알아

 

찾았다 빨리 나와요, 소리치자

한 줌 뼛가루로 변신한 내 아버지

머리 긁적긁적 계면쩍은 웃음 흘리며

솔솔솔, 한지 꾸러미 속에서 빠져나와

섬잣나무 그늘 밑 깊은 구덩이에

영영 숨어버렸네

 

 


 

 

이원숙 시인 / 소 들어오는 날

 

 

정육점 유리문에 큼지막한 빨간 글씨

‘오늘은 소 들어오는 날’

 

마장동을 빠져나온 소의 나신이 쇠고리에 매달려 있다

두 눈 껌벅이며 살아 있던 소는

뿔도 털도 뺏기고 내장 다 쏟아내고

죽지 않으려던 발버둥도 놓아버렸다

목장갑 낀 사내가 뼈에 붙은 살을 부지런히 발라낸다

삶의 역한 냄새가 장갑에 들러붙는다

 

한낮의 산부인과 진료실

의사가 돌아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난, 관, 포함, 난, 소, 자, 궁……

주문받은 품목을 꼼꼼히 입력한다

메스를 쥐고 내 복부를 가르고 내장을 뒤적이게 될

그는 전문가, 나는 의뢰인

그와 나는

무영등 불빛 아래 가랑이를 벌리고

뻔뻔함을 맡기기로 한 그렇고 그런 사이

 

‘내일은 풍납동 대형병원 수술실에 늙은 암소가 되어 들어가는 날’

 

고깃국을 먹어야 속이 든든할 테지

고기 한 근 끊었다

비닐봉지 속 묵직한 소의 식은 살덩이

죽은 소가 뿔을 디밀고 깜깜한 내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이원숙 시인 / 환승역

 

 

 이정표가 없었다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데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머리 위에도 길 발밑에도 길 벽면에서 화살표가 날아다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까만 뒤통수들을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모자 쓴 뒤통수 상고머리 뒤통수 더벅머리 뒤통수 매점 지나고 사각기둥 지나 환승 통로에 들어섰다 창이 없는 통로엔 해가 뜨지 않았다 길 끝에서 길 끝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우울한 계절이 몇 번인가 얼굴을 바꾸었다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겨울겨울, 외투를 벗었다가 다시 껴입었다 해가 뜨지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흩날렸다 꿈을 꾸어야 춥지 않았다 깨고 나면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갔다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공중에 떠다녔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회날 울리던 휘파람행진곡이었다 죽은 자가 죽은 채로 일어나 걸었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발밑에서 와사삭 서릿발 소리가 났다 쥐들이 통로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어깨를 부딪치며 아슬아슬 지나갔다 저마다 제 꿈속을 걸어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이 길은 언제 끝날까 끝이란 게 있기나 할까 행진곡이었던 휘파람은 장송곡 같기도 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곡조, 꿈속인지 잠 속인지 환기되지 않은 불빛이 몽롱하게 비췄다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가고 있어? 통로 끝 출구는 보이지 않는데 빗발치는 저 화살표 화살표

 

-시집 『거미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원숙 시인 / 햇살로 집을 짓는 나무

 

 

겨울나무는 남쪽으로 창을 낸다

창을 열면 남쪽에서 날아오는 새들이 처음 만나는 가지 위로파릇한 새순과 어린 햇살을 물고 온다

한 줄기 기운과도 같은 햇살이 밝아 오는 나뭇가지로 집을 짓고

잎사귀 커튼이 되어 찰랑거리고 반짝인다

한 번도 노래하지 못한 빛과 바람의 입술을 불러온다 휘파람이 되어 휘리리 휘이

산벚나무 가지와 가지 사이 직박구리의 빈궁한 집과 동박새의

신혼집 한 평 남짓 보금자리를 만들고 빛의 열매들을 잉태한다

새들의 울음으로 만들어진 나무의 몸 온몸에 귀를 매달고 있다

다 자란 새들은 나무에게서 날갯짓을 배우고 남쪽 창으로 날아간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소리의 첫 날개를 달고 날아갔을까

겨우살이 내내 숲을 읽었다 공기와 온도를 섞어 햇볕과 그늘이교차하는 무늬를 짰다

겨울을 견딘다는 건 햇빛이 밝아 오는 남쪽으로 쉼 없이 창을내는 일이다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023.04.26.

 

 


 

이원숙 시인

울산 출생.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2016년 <미네르바>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