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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진 시인 / 동작동(銅雀洞)
여름은 쥐똥나무 잎새로 새로워진다 바람은 언제나 어린 것 어린 잎가귀나 흔들고 이곳에도 북망(北邙)의 소의(宵衣) 자락이 흔들려서 그대들의 유월은 늘 지난 유월이 된다 그렇다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흔들릴 줄 모르고 다만 가난한 밤 풀벌레 소리가 그대들의 여름 무더위를 배회하면서 흔들려 사위어질 뿐 여름은 에프킬라 냄새로 빨리 사라진다 날밤, 가슴팍 새롭고자 눈물 참아 지새워도 땅속이었다가 하늘이었다가 하는 세월에 우리는 이조(李朝)의 골동(骨董)처럼 익숙해져서 간이(簡易)연애 간이애국으로 그대들의 여름 앞에 목 떨구어 다채로운 조화(造花) 몇 묶음을 던지지만 아, 비루(鄙陋)하구나 그대들 어깨동무시절로 병들지 않고 살아서 그대들의 유월 마파람에 흔들릴 줄 모른다 그렇다 바람이 불면 잡풀이나 흔들리고 그대들의 유월은 늘 지난 유월이 된다
한우진 시인 / 굴신(屈伸)
Ⅰ 현상(現像)
오징어나 쥐포를 구워본 사람은 알지 오징어나 쥐포를 구워보면 그것들의 몸땡이가 여실히 뜨거운 쪽으로 오그라지듯이 추운 날 유리를 통째로 붙잡고 있는 하이새시 창틀이 덥고도 더운 실내 쪽으로 마냥 휘듯이 가진 자를 향해, 후끈한 쪽으로 아, 사람들 등때기 휘는구나! 구부러지는구나 하고 탄성(彈性)에 가까운 탄성(歎聲)을 지르지 쥐포나 오징어를 구우면서 알게 되지
Ⅱ 현대시학(現代詩學)
과학자에게 필요한 건 실험실이 아니라 집념이다. —아서 콘버그(스탠퍼드대 생리의학 교수)
발표지면이 없다고, 실험실이 없다고, 시 같은 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나 우울해서 술 마신다 침 뱉는다 그러다가도 내가 뭘 모르고 사는 것 같아 현실을, 현대시를, 현대시학을 잘 모르면서 시 쓰는 것 같아 반성하면서 자문을 해 본다 어느 나라고, 어느 시대고 시인은 셋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나머진 잘해야 모국어의 비료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샘도 셋이면 목 축이는 데 넉넉할 터 머리맡에 하나, 가슴팍에 하나, 부르튼 발바닥에 하나 나머지야 탁류(濁流)에 보태질 흙탕물이지 않은가
흙탕물도 되지 못한 처지에 술 취해 비료도 안 되는 주제에 그날도 술집에서 상계동에 사는 정 모(某)라는 시인이 나에게 ‘현대시학’에 발표 한 번 못한 시인은 아직 우리나라 시인이 아니라고 못박았을 때 이런 개새끼! 욕지거릴 퍼부었지만 이런, 이런, 욕만 할 게 아니지 이렇게 현재를 모르고 현대시를 모르고 무엇보다도 현대시학을 모르고 ‘현대시학’의 지면을 모르고 왜 오그라진 몸땡이가 안 펴지는지를 아직 모르고 나는 참
—《시인세계》 2011년 여름호
한우진 시인 /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었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한우진 시인 / 완결(刓缺)
눈썹 끝에 인두 올려놓고 일없다, 울 일없다 마음에 빳빳하게 풀먹여가며 더딘 사랑을 쓰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소용없다 꽃! 풀이 바람에 온몸을 벼리는 동안
새가 하늘에 내 천川자를 천 번이나 긋는다 새의 날개가 닳는다
일없다, 사랑 없다! 닳는 것은 강을 받아쓰는 갈대만이 아니어서
몽당연필 같은 나도 당신의 책받침을 끼고 어깻죽지가 아프다
한우진 시인 / 고유명사固有名詞
그는 지금 「비올라」 라는 시를 제작하면서 과거의 시적 대상들──옥양목, 초승달──을 미화하려 한다거나, 자신의 아내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척하면서 메마른 사랑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니다. 이름에 남아 있는 탄식, 목소리나 향기와 같이, 이름들은 고뇌의 종착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간다. 치매에 걸리면 이름이나 고유명사를 먼저 잊어버리고, 차례차례 보통명사, 형용사, 부사를 잊어버리고, 동사는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고형성固形性을 그는 전환시키려 한다. 가장 커다란 욕망이 가장 먼저 죽다니! 소나무 가지에서 눈이 뭉텅이 째 뛰어내린다. 이름이 사라지면 고뇌도 사라진다. 휘지비지諱之秘之! 어긋나게 말하고 감추려 한다. 병원 진찰실 앞에서 간호사가 이름을 대라고 하면 그는 저항한다. 진료카드에 찍힌 번호를 보여주며 이름을 닫는다. 그는 프로야구 감독의 이름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그 팀의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채널을 자주 다른 데로 돌린다. 앵커가 수시로 호명呼名을 일삼기 때문이다. 양명揚名은 탄식이다. 간직하려는 자에게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
한우진 시인 / 치빙馳聘
절을 기웃대던 말의 시절이 있었다. 근사록 近思錄 따위를 읽었던가, 거무튀튀한 감나무에 목을 맨 비구니의 야윈 손목이 적삼고름고드름 같던 운문사雲門寺 근처의 겨울밤이었던가, 바람에 올라탄 바람 눈도 내리기 전에 눈 속으로 뛰어들던 나는 무언가無言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불에 가까운 돌로 가슴을 짓이기며 달리는 때가 있다.
한우진 시인 / 죽변竹邊
바다에 가면 시를 쓸 수 있지. 쓸 수 있다니깐, 여기서는 말이야 바다도 테트라포드로 시를 쓴다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죽편’이 아니라니까. 길게, 파도가 테트라포드를 후려친다. 나그네도 아닌 주제에 걸핏하면 몇 푼, 몇 푼하다니 (특히) 후배들에게 손 내밀지 마라. 이제야 좀 알아듣겠나, 그래 죽빈이라니까! 비가 들이친다. 비가 휘몰아친다. 춥다. 배호 노래로 몸을 덥힌다. ‘남이 된 사아람 ……’*
*배호,「울면서 떠나리(기적 슬픈 새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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