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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성희 시인 / 벽난로가 타는 집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7.
배성희 시인 / 벽난로가 타는 집

배성희 시인 / 벽난로가 타는 집

 

 

연기가 잘 빠진다 오빠의 벽난로는

연통이 높다 장작들은 삼각형으로 서로 기대어

불은 다정다감 잘 타오른다

기하학과 물리학 그리고 경제학의 삼각소통이 수월하도록

중년부터 낚시라는 마력에 흘려 세운 호숫가 하얀 집

오빠의 노후대비 난로불꽃이 와인 병을 비추며 타오르는 저녁

친정나들이 온 나는 벽걸이TV '무한도전'쇼가 재미있어

웃음을 허허 날리다 그렇게라도 웃어야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발효되지 못한 채 쉰 내 큼큼한

서로의 이질감을 견딜 수 있다

오래된 영화의 노래처럼 '클라임 에브리 마운틴'

하지 못하고 소심했던 오누이는 7년 연애결혼 부부나

첫 중매결혼 부부 모두 불면의 겨울 밤 각방 신세다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모든 산을 올라가보라고

커가는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은데...어쩌면

가족은 장작불과 연기와 재를 끌어안고

꼼짝달싹 못하는 벽난로일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마당

닭장에서 생겨난 병아리가 모이를 자꾸만 뺏겨서

 

애가 타는 아버진, 따로 둥지를 만들어 키우자 하시고

오빠는 놔먹이자고 적자생존을 들먹이는 지금

나는 직장생활 30년에 닭장 같은

집 한 칸도 없어서 또 허허 웃어본다

북서풍 세찬 오늘 밤, 토막 나버린 꿈의 무한도전이

벽난로 속에서 우물쭈물 타오른다

 


 

배성희 시인 / 염려

 

 

그대가 염려됩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찌르르

살갗이 아픕니다.

이런 저물녘이면 덩달아

마음 한 편도 회색빛으로 차분해집니다.

한 번도 그대에게 다가간 적 없지만 그대는

결코 낯선 타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 시선 따라

발걸음을 멈춰 본 적 없지만

내 시선 어디쯤에는 늘

그대가 있었습니다

그대와 나의 거리는 억겁으로 아득했으나

나와 그대는 어쩌면 같은 배경 속에

내내 소소한 사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여름의 초입에서 나는

대지에 온전히 붙박이지 못한 채로

깃발처럼 허공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약간의 편두통과

귀밑을 스치는 생경한 바람 속에서 그대는

우연인 듯 내 어깨를 두드립니다.

그대가 염려됩니다

고즈넉한 낯빛이,

침묵으로 다져진 고른 숨결이

 

 


  

 

배성희 시인 / 모든 벽은 모서리에서 만난다

 

 

일산화탄소와 니코틴에 노출된 벽은

병색이 완연했다

익숙한 이름의 관계들이

메마른 무릎을 맞대고 앉자

어둑어둑 밤이 깊었다

우리의 언어는 번번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굴절되고

지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악수가 널브러진 귀퉁이마다

아무렇게나 쌓이는 닳고 닳은 농담들

뱀처럼 똬리를 튼 담배 연기에

누군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뿌연 삼차원에 감금당한 채

껌벅껌벅 눈이나 마주치고 마는 것이다

'지나다 들렀습니다'

길고 싱거운 주점 간판 아래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

동차원의 동지들은

서늘한 밤공기에 옷깃을 여미며

각진 서로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렸다

 


 

 

배성희 시인 / 유화

 

 

지구둘레만큼 탯줄이 길어서, 우리는

함께 있어도 밥을 따로 먹는다 각방에 돌아누운

침묵을 대신해 89.1 주파수 혼자 명랑하다

키스는 한순간이지만 요리는 영원합니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곰팡이 가득 핀 정원에

파랑새는 없고 영혼이 사라진 계약서는 더 질겨진다

상 처 는 있 는 데 아 프 지 않 다

기름 공기에 젖어 무거운 팔다리, 겨우 발가락 세워

바깥을 두리번거리는 높이에서 무표정한 그림이

굳어가고 있다 거짓을 감춘 여려 겹의 입술이

장대높이뛰기 신기록을 깬 눈동자들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가수면의 하루하루 뭉개진 벽화를

르노아르 풍으로 덧칠하면서, 우리는

화사하게 잘 살아요 어머니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 에서

 

 


 

 

배성희 시인 / 닭살과 달의 우주쇼

 

 

20년을 살아도 몰랐던 마을뒷산 둘레길

걷기 전에는 알 수 없는 秘境이 분명 있다

 

산 채로 깃털을 뜯어내, 회쳐먹는 닭고기 맛이 기막히다는

주모 너스레에 닭살이 돋아 낮술을 마셨다

오늘밤 예정된 개기월식은 11년만의 우주 쇼라는데

시간은 늘 우리의 선택과 함께 흐르고

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녹음 우거진 오후 고즈넉이 내려와 계곡물에

긴 다리 끝을 적시며 사뿐사뿐 거닐던 왜가리는 어디로 갔을까

숨죽여 지켜보던 나하고 딱 한 번 눈 맞추고, 홀로

생각에 잠겨 산책하던 새가 단풍과 낙엽을 박차고

커다란 날갯짓으로 찾아간 달에서 겨울잠을 청한다면

 

당신 무릎을 베고 평상에 옆으로 누워

나의 능선을 처음 보여준 그 여름부터

달은 차올랐다 기울기를 여섯 번

 

매일 당신이 쓰다듬는 페르시안 고양이털 담요를

머리까지 끌어당겨 덮어본다 온기 없는 방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는 아르테미스 불면증에 시달리는

달의 여신을 안고 아득한 꿈에 잠기면

 

서서히 지워지는 달이 조금씩 부푸는 달이

담요 안에서 우주 쇼를 펼친다

 

견디기 어려운 추위에도 은밀한 근육은 뜨거워

온 몸이 떨리는 사랑이라면, 몬도가네 미식가를 위해

산 채로 털이 뜯겨나가는 닭의 살처럼

그림자가 지나간 달의 구멍마다 왜 피가 맺혀있는지

소름끼치는 불치병을 왜 끙끙 앓고 살아야하는지

오래 눈을 맞추고 물어봐야겠다

 

-<시와 환상> 2012 봄호

 

 


 

 

배성희 시인 / 타히티

 

 

붉은 보자기를 벗어던지고

보라보라 바닷속으로 잠수

 

가오리와 나는

처음인데 서로 처음이니까 더 두근거리지

 

우리는 에메랄드 액체에 빠져

눈을 맞추고 지느러미를 흔들고

피부를 비빌 수도 있어

상어가 휙 지나갈 때

가오리 웃는 입에 뽀뽀도 하고

상어가 휙 지나갈 때

가오리 하얀 가슴에 못을 박아

펄럭이는 마음자락 걸어보려고

머나먼 여기까지 왔으니까

상어가 휙 지나갈 때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싶으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우리는

바다, 하나의 바다가* 될 때까지

 

노려보던 상어가

덥석, 삼킨 것은

살코기가 아니야 바닷물이야

 

*독일 밴드 silvermoon의 노래 meer sein에서

 

 


 

 

배성희 시인 / 물속의 이사

 

 

어두운 강으로 가

5톤짜리 거짓말을 빠뜨릴 거야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아도

잠자던 너는 깨어나지, 밤사이 내가

나간 것을 알지만 계속 자는 척 하지

깊이 잠들어야만 꿀 수 있는 긴 꿈

 

그 속에 방을 넣고 창문마다 레이스커튼을 달지

핵을 관통하는 드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초고속터널을 만들 거야

 

깊이 꿈꾸어야만 잘 수 있는 긴 잠

 

어디에 매달까 5천개의 백열등

스위치를 누르면 너의 잠은 환하게 타겠지

불꽃 모자를 쓰고 어두운 강으로 달려가

5톤짜리 모래집을 지을 거야

 

모래가 너 와 나 처럼 부스러지고

지구의 모든 물이 우리처럼 섞이는 밤사이

 

 


 

배성희 시인

서울 출생. 이화여대 생물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 『타오르던 암벽에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과학교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