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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철 시인 / 초원의 빛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소용돌이치며 먼 바다로 나가는 합수머리 살얼음 낀 개펄에 재두루미 떼 내리는 늦가을
한국은 새 천년을 맞이하려고 분쟁 지역에서 부쳐온 철모와 탄알과 탄두를 녹여 평화의 종을 만들었습니다. 몽골은 할흐강 유역에서 관동군을 물리친 탱크 포신 30㎝를 보내왔습니다 . 임진각에서 평화의 종이 울릴 때마다 초원의 빛이 터져 나갔습니다. 초원의 빛은 할흐강의 은빛 물결소리와 올리아스 숲의 푸른 바람소리를 지평선을 넘어가는 양떼의 울음소리를 되울려 할힌골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의 어두운 기억을 달래고 깃발을 쥔 채 이름 없이 스러진 영혼들을 온누리에 떠도는 피맺힌 원혼들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 초원의 빛을 타고 재두루미떼도 부이르 호수를 지나 다리강가 숨팅터이룸*에서 숨 고르다가 살얼음 낀 개펄로 날아들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합수머리 물살이 잔잔해집니다.
* 몽골 수흐바타르 아이막(도) 다리강가 솜(군) 지역 이름. 이 다리강가 일대는 돌하르방 같은 석인상과 고구려와 고려의 제단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늪지나 호수가 많아 시베리아에서 한국 철원이나 서해안으로 날아가는 독수리, 고니, 재두루미 등 겨울 철새들의 중요한 이동경로가 되고 있다.
신대철 시인 / 극야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1
서울이나 평양에서 오지 않고 사우스 코이아나 노스 코리아에서 오지 않고 우리가 어린 시절 맨 처음 구릉에 올라 마주친 달빛을 눈에 가슴에 다리에 받아와 꿈을 뒤척이던 그 금강 그 개마고원에서 온 날은 구름에 살얼음이 잡히고 광륜을 단 두 개의 달이 마주 떠 얼음 안개 속을 스치는 화살 다리를 비추고 있었던가요.
화살 다리* 그 아래 낮은 판잣집 지붕 밑에서 에스키모들은 술과 마약과 달러와 민주주의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우리는 빙평선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가요.
그날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자 당신은 '개마고원요'하고 얼어 있는 나와 갑자기 내 뒤에서 저절로 맟춰진 우리의 환한 얼굴까지 함께 보았지요. 그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서로 幻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한 얼굴로 극광을 보면서 광륜을 단 두 개의 달을 굴려 극야에서 주야로, 다시 백야를 향해 가고 싶었던가요.
극야를 넘어 67일째, 마침내 15분 간 떠 있던 금강에서 개마고원에서 동시에 떠오른 해.
* 에스키모 설화에 의하면, 외로운 별과 눈을 맞추면 잡혀간다고 한다. 한 아이가 아버지 말을 어기고 별과 눈을 맞춰 별나로로 잡혀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오기 위해 별을 향해 무수히 화살을 쐈다. 날아가는 화살 꽁무니에 화살을 쏴 화살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로 별나라에 올라가 마침내 아들을 구해 왔다.
신대철 시인 / 나는 풀 밑에 아득히 엎드려 잎에 잎맞춘다 ㅡ 산늪4
늪에서는 물기 없이 젖어드는 눈, 살기 도는 몸기운도 부드러워진다. 내려갈 땐 어디든 돌아서 갈까, 숨 막던 산길 한 허리씩 풀며 돌과 나무 속에 들어가본 적 없는 이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내리막에는 굽은 허릴 조금 세워볼까.
오, 하느님. 분지 품은 능선에는 봉긋봉긋 날아다니는 꽃봉오리 천지, 멍게 열매 두드리다 언 눈 녹는 소리 퍼트리는 동고비꽃, 어둑한 숲속 나무 사이를 뒤져 마을길 찾아주고 홀연히 사라지는 곤줄박이꽃, 빈 움막 버려진 혼을 눈 깊이 간직하는 오목눈이꽃,
바람에 가늘게 울리는 연둣빛 향기, 아른거리는 구겨진 잡풀 하나 돌 틈에 속잎 트고,
바스락거리는 몸 속에 도는 흙내, 나는 풀 밑에 아득히 엎드려 잎에 잎맞춘다,
잎, 잎, 향긋,
신대철 시인 / 자연
1 산기슭에 몰린 안개더미가 잔잔히 밀린다. 안개더미는 잠시 얇게 풀어지면서 山少年의 뛰는 모습을 이루더니 소년을 홀로 산 꼭대기에 남겨두고 사라진다.
2 산 꼭대기에 걸려 출렁거리는 무지개 위에 맨발로 서서 건넛산을 향해 외치는 소년의 들뜬 목소릴 듣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 툭 꽃망울이 터진 노루발풀 해가 타오른다, 산 3시 풀잎 꿈 속에 꼬부려 누워 소년은 잠이 들고 이글이글이글 풀잎 꿈 속에서 소년의 꿈 속으로 불덩이 가 넘어간다.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에서
신대철 시인 / 사막은 어디 붙어있어?
우리가 머물러 있는 곳은 어디든지 바람이 불었습니다 꿈속으로 잔 모래가루가 날려왔습니다. 물이 되는 갈증, 서로의 물 소릴 빨아들이며 서로서로 묻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합쳐서 사막입니다.
우리가 안 보입니까? 흐르지 않는 소리, 소리를 잡아요, 비명이 되게
그러나 그대는 또 묻습니다. "사막은 어디 붙어있어? 아라비아에? 돌아보면 내 뒤?"
신대철 시인 / 천마의 시
약초를 캐러 오던 이가 있었다. 그는 마른 천마 서너 뿌리 내놓고 아무 집에 서나 밀린 잠을 잤다. 아무리 깨워도 잠꼬대로 대꾸하며 일어나지도 먹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마음이 허한데다 뱃속에 헛소문만 넣고 다녀 저 모양이라고 역정을 내시다가 아랫목에 밥 한 그릇 묻어놓고 슬며시 밭에 나가셨다. 돌아오면 잘 갠 담요 옆에 밥그릇 비어 있었고 뒤꼍에 나무 한 짐 부려 있었다.
그는 백복령 적복령 얘기만 하면서 산동네엔 천마 캐러 다닌다고 소문을 냈다. 일거리 떨어지고 이웃들 눈빛 험해지면 옆동네 풍맞은 홀아비 살림까지 거들어주다 산속으로 들어가 천마 꽃대와 함께 사라졌다. 겨울 지나 숲 속에 그늘 잡히고 싹 돋아나기 시작할 때 물골 타고 올라와 언제나 꾸중하시는 할머닐 어머니잉 하고 불렀다.
천마 드물어지자 길 넓혀진 물골에서는 어머니잉 하는 바람 소리만 울려왔다.
신대철 시인 / 몽골 일기 4 -계민석에게
해무리가 하늘 반쪽을 다 채우고 구름이 비행접시처럼 떠 있는 날, 강의 시간에 맞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바람도 햇빛도 스치지 않고 먼 데 보고 걸어가는 그대, 서울에 살았을 때도 서울에 살지 않았고 울란바토르에 살면서도 울란 바토르에 살지 않는
그대 길 없이 오르내린 언덕 밑에 몸 붙일 수 없는 꿈 붙이고 그대 숨결에 취하다 그대가 버린 길로 돌아간다. 흙도 바람도 햇빛도 핏줄이 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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