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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식 시인 / 시인은 외톨이처럼
스스로 딱하다 여길 때 현몽(現夢)이 왔지
꿈속에서 내가 나에게 혼나는 말 "한권 시집도 없이 올라오지 마라."
고개 숙이고 익숙한 눈빛들과 헤어져 논둑과 강둑과 손금 같은 산길을 오갔지
해질녘, 잎 지는 소리마다 시한소절씩 가슴에 넣고 세월이 가고
어느 날, 꽃망울 터지듯 시가 진물처럼 밀려나왔지
여기까지 떠밀려 와서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외톨이가 되었지
-시집 <시인은 외톨이처럼>에서
박노식 시인 / 가장자리
오디나무도 백합나무도 대숲도 눈을 맞는다
바람 불자 나뭇가지에 얹혔던 눈들이 멀리 날아간다
쌓인 눈이 무거운 대나무는 더욱 기울고 이마가 땅에 닿았다
한그루 대나무를 오래 바라보는 나의 허리도 휜다
박노식 시인 / 젊은 애인과 백석과 아름다운 석인상
눈이 와서, 젊은 애인은 정신을 놓고 백석만 찾는다 백석과 시를 읊으며 산으로 간다 나도 아니고 나타샤는 더욱 아니어서 그가 산으로 데려가 살고 싶은 이는 눈밭에 앉은 까마귀만큼 많겠지만, 내가 모르거나 내가 알아도 착한 이는 아닐 것이다 지금쯤 그는 어느 산에 들어서 백석도 없이 혼자 앙앙 울 것이다 새벽 눈을 밟으며 운주사로 들어간 나는 와불 아래 한 석인상 앞에서 몸이 굳었다 머리와 눈썹과 콧등과 입술과 목과 어깨와 발등, 그리고 길게 흘러내린 물결 같은 가사(袈裟) 위에 눈이 고였다 눈이 와서, 잃어버릴 뻔한 젊은 애인을 거기서 다시 만났다
- 《내일을여는작가》2022년 하반기
박노식 시인 / 깊은 눈
일생(一生) 별을 보고 별을 꿈꾸는 사람들은 눈이 깊지 자기 전부가 어두워져버리니까
아, 눈, 그 시린 거울 속으로 내려가 길을 나설 때
순간 몇 개의 별이 떠올라 나를 이끌어주었지
눈 깊은 김수영과 카프카와 고흐
이들 초상(肖像) 앞에서 눈을 맞추고 시를 짓고 늘 서성거리며 또 하루가 지나갔지
어느 날 간신히 빠져나온 탱자나무 울타리 밖, 긁힌 이마가 쓰려올 때
꿈같이 맑은 동공 속으로 머뭇거리던 시가 다시 들어오고 김수영과 카프카와 고흐의 눈이 외로이 들어앉고
나의 눈썹은 장미가시보다 뾰족한 그늘을 드리운다
박노식 시인 / 빈손으로 와서
한 상념이 오래 머무는 그늘 안으로 산비둘기 소리가 잠깐 들어왔다 나가버린다
삭정이를 바라보는 눈은 젖어서 잠시 고갤 돌려도 눈가는 축축하고 삭정이를 꺾어 그날 밖으로 꺼내 놓으니 그제야 눈가가 마른다
빈손으로 와서
겨울 처마 밑 한 줌 햇볕이 지나는 동안 나의 계절은 멀리 달아나는 산새의 길을 쫓는다.
박노식 시인 / 부부이발소
제때에 배달된 짬뽕 두 그릇 뜨건 열이 들어 올린 풍선 같은 크린랩이 어느덧 지치고 늘어져 흐물흐물하다 머리칼이 정갈한 이발사는 거울 속에서 분주히 가위지를 해대고 마른 면발 두어 가닥이 방금 지나간 듯 그의 이맛살이 눈부시게 깊다 앞선 손님의 면도를 마친 여자는 쏟았던 신경을 조금씩 풀어가며 손님의 머리를 감겨준다 그동안 지문이 닳아서 미끌미끌해진 열 손가락이 두피에 닿을 때마다 따뜻하다 한 시간을 조금 넘긴 후에야 앞의 세 손님이 사라지고 이발소엔 고요가 찾아온다 이제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구석진 의자에서 수면을 취하던 한 손님의 코고는 소리가 느닷없이 귓전을 울린다 부부에겐 피로를 덜어낼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골목 어귀를 돌아 담장 밑을 걸어가는데 늦은 봉숭아 꽃잎 두어 장만 남아 떨고 있다 부부의 늦은 점심을 떠올리니 발걸음이 제대로 나아가질 않는다 불어서 이미 통통해진 면발만큼이나 그들의 행복도 통통하리라
박노식 시인 / 새의 발톱이 움켜쥔 한 조각 그리움
저 하늘 봐, 흘러가는 구름은 정말 순결한 거야 무거우면 풀어지고 또 흩어져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우리를 긴장시키는 거야 생각해봐, 가식으로 만들어진 구름 봤어? 구름은 늘 신선한 거야 그림이 아니니까 박제가 안 되니까 나도 저래 봤으면? 이런 엉뚱한 꿈을 꿀 때가 있었지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 안개구름, 면사포구름......... 근데 말이야, 저 새털구름은 어디서 왔지? 스무 해 되던 날, 완도 명사십리 해변에서 올려다본 슬픔 같아 그때의 순선과 경환과 봉근과 미정, 그 눈빛들이 파도처럼 쓸려서 여기까지 떠밀려온 거겠지 그런 마음이 드니까 갑자기 눈물 나네 이미 내 몸에 들어와 앓고 있는 그대들, 울렁거리네 떡갈나무 잎으로 빚은 나의 악기 해거름 녘에 올려다본 떡갈나무 우듬지에 앉은 새의 발톱, 무얼 그리 움켜쥐고 놓질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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