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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극 시인 / 도랑가 잣나무 생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7.
김남극 시인 / 도랑가 잣나무 생각

김남극 시인 / 도랑가 잣나무 생각

 

 

저 도랑가 잣나무는 억울했을 것이다

한 번쯤은 누구에겐가 기대고 싶었을 것이고

한 번쯤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을 것이고

또 한번쯤은 옆 밭에서 감자 캐는 여자와 바람이 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도랑가 잣나무는

강한 듯해야 하고

의연한 듯해야 하고

늘 한 발씩 자란 증거를 보여야 하고

한 해 건너 잣꼬생이를 정수리에 달아야 하니

꼭 그래야 하나

그런 척해야 하나

문고리에 손이 쩍 달라붙는 겨울 아침

우물에서 올라온 지구 내부의 숨결을 하얗게 뒤집어쓴

잣나무를 생각한다

밤낮으로 생각한다

 


 

김남극 시인 / 가을 비

 

 

늦가을 비가 오고 추위가 거미처럼 천장에 매달리면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려

바닥을 지나는 소리를 듣는다

 

물소리는 말라가고

그 속에 어떤 울음도 그쳐가고

내가 버린 슬픔도 차츰 멀어져 가는데

 

그 소리 속에 자꾸 내 몸도 마음도 들어가서는

최대한 몸을 말아 넣고

구부러진 곡선만큼 세상을 껴안아 보려고

손아귀에 힘을 줘 보는데

 

자꾸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저 슬픔들

멀리 혼자서 꺼이꺼이 우는 저 슬픔들을

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니

서늘한 이 늦가을의 빗소리는

자주 꿈속까지 그 영역을 넓혀오고

 

난 또 몸을 더 둥글게 말고 엎드려

그 소리를 밤새 듣는다

 

 


 

 

김남극 시인 / 산거 山居일기/18

- 혼자 먹는 저녁

 

 

두 아이 공부하러 서울로 떠나고

나는 식은밥처럼 앉아 저녁을 먹는다

 

혼자가 참 편할 듯해서

혼자를 원한 지 오래다

 

아내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으나

나는 한참 전 아내를 포기했다

 

내가 나를 잘 모르는 시절이 와서야

나는 혼자인 꿈을 이룬 것이다

 

혼자 먹는 저녁은 참 슬프지만

도 강건한 무엇이 있어

 

나는 식은 순두부 찌개를 데우지도 않고

착실하게 퍼넣는다

 

 


 

 

김남극 시인 / 늦은 소원

 

 

봄이 되면 밭가에 사과나무를 두 주 심었으면 좋겠구나

 

그러세요, 제가 산림조합 나무 시장서 조생종으로 사다 드릴게요

 

그만두자, 옆 밭에 그늘지면 농사 안 된다

 

아니요 그냥 심으세요, 농사가 안 되면 얼마나 안 될라고

 

그만두자, 내가 그 사과를 먹을 날까지 살겠냐

 

아니요, 요즘 사과나무는 심으면 이태부터 달려요

 

그냥 심으세요

 

녹내장 수술을 한 어머니 눈에 불빛이 잠깐 어린다

 

 


 

 

김남극 시인 / 배달라이더처럼

지난 두 해 동안 나는 배달라이더처럼 살았다

바이러스라면 유독 경기驚氣를 하는 식구들은

모든 걸 배달시켰다

나는 밥이며 국수며 심지어 삼겹살까지 주문하고 찾으러 다니면서

수많은 배달라이더와 마주쳤다

두꺼운 마스크와 검은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그 라이더의 눈빛에는

지금 모두의 눈빛을 대신하듯

불안과 두려움, 분노와 어떤 초조가 섞여 있었다

잠시 교차하는 순간에도 전해지는 그 눈빛들

나도 그 배달라이더처럼 두 해를 보내면서

점점 내 눈빛이 그들과 닮아가고 있다는 걸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알았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김남극 시인 / 은행나무꽃

 

 

밭가 은행나무 아래

새벽에 나가보니

눈물 같은 꽃 떨어져 있다

은행나무꽃 본 이가 없다

밤에 꽃 피었다가

밤에 꽃 진다

누가 오지의 슬픔을 아랴

자정 넘어 혼자 울다

혼자 잠드니

 

 


 

 

김남극 시인 / 내 정체성에 대한 고백함

 

 

말하자면 나는 원시인에 가깝다

산을 보면 산나물의 분포를 가늠하느라

 

위아래를 훑어보고 능선과 골을 가로지르는 식생대를 살펴보고

고도와 방위를 재어보고

봄이 오면 꼭 저 어디쯤 나물을 뜯으러 가보리라 다짐한다

 

또 나는 수렵인에 가깝다

정선 가는 길을 나서 여러 겹으로 허리를 집어 흐르는 오대천을 보면서

메기낚시 하기 좋은 곳과 족대로 퉁가리나 기름종개 잡을 곳을 생각하다가

자주 중앙선을 넘기도 하면서

모내기쯤이나 상강쯤 고기 잡으로 다닐 생각에 빠져

경건한 숲과 완고한 절벽을 보지 못한다

 

또 나는 원주민에 가까워서

골짜기 마가리까지 치뻗은 비탈길이 묵는 걸 아쉬워하고

떠난사람의 흔적도 지워져 추녀가 내려앉은 헌집을 건너다보며

살던 이의 흰 고무신과 감자구박과 이가 빠진 밥그릇을 생각하다가도

뒤란에 핀 뚝 감자꽃을 보며 꽃 지면 뚝 감자 캐러 갈

산뜻한 기대에 몰래 즐거워하기도 한다

 

내가 원시인이고 수렵인이고 원주민인건 분명한 일인데

요즘은 자꾸 화전민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며 자주 놀란다

어디론가 가야 할 듯하고

새 사람을 만나야 할 듯하고

새로 아이를 낳아야 할 듯하고 또

이 삐걱거리는 생활도 갈아 끼워야 할 듯하다.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에서

 

 


 

김남극 시인

1968년 강원도 평창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0년 <강원작가>에 작품 발표 시작. 2003년 《유심》 신인문학상 수상을 통해 등단.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너무 멀리 왔다』. 원작가회의 사무국장. 현재, 봉평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