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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시인 / 가을의 바다
중년의 사내가 마음속 깊은 상처 하나를 안고 백사장에 앉아 가을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지난 여름의 격렬한 감정이나 불면과 고통으로 더이상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혹은 세월처럼 혁명도 이데올로기도 저만치 멀어져버린 것 같은 오늘의 견딜 수 없는 이 쓸쓸함 그러나 그 속에서 패배를 배우고 인생의 겸허를 느껴보자 나도 이제는 가을의 바다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 물러날 때의 쓰린 비애를 제대로 배워보자
김용락 시인 / 귀가길
햇살 좋은 가을날 선배 서점에서 차를 마시다가 불현듯, 애기 목욕시키러 집으로 향한다 결혼하고 애기 낳아 기르는 새로울 것 전혀 없는 평범한 일상사가 지금의 내게는 벼랑 끝을 걸어온 마음이다 검정고무신 신고는 소풍가기 싫다고 보리밭에 숨어서 울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어느덧 한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 소소하고도 감격스런, 골목길 응달 한구석에 빼꼼히 목을 내민 풀 한포기 그 연한 섬유질이 새삼 마음에 걸려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가만히 다짐도 해보는 어느 가을날의 귀가길 이렇게 하여 이젠 사는 것이 절로 시가 되기도 하는가보다
김용락 시인 / 늙은 느티나무
치과대학 붉은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이른봄의 느티타무 잎새가 유난히 선명하다 연초록의 색깔이 주는 뜻밖의 이 강렬함과 황홀함! 한때 젊은 여류작가는 『젊은 느티나무』를 써서 근친간의 사랑을 노래한 바도 있지만 긴 세월 동안 도심에 서서 최루탄 가스가 잎새에 층을 이루고 계엄군의 무장한 탱크가 교문을 가로막고 끌려간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격렬한 대자보가 붉은 담벼락에 나부낄 때에도 이를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노인 같은 느티나무 오늘 아침은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삭여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 생명의 어쩔 수 없음을
김용락 시인 / 별
도종환 시인이 요양하고 있는 속리산 기슭 보은 법주리 조종골 하루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까 싶은 외로운 산골짝이다 <분단시대> 문학 동인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음주하고 웃고 떠들고 기념사진 찍고 새벽녘에야 기어코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눈이 떠져 천장을 보자 창문 밖 저 멀리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전교조하고 해직되고 징역살고 마침내 병까지 얻은 그 고마운 마음 곁에 비슷하게 풍상을 겪은 또 다른 얼굴이 십여 개 누워 있다 푸석하게 부은 세월의 흔적이 누워있다 조금 가혹한 것 같지만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그렇게 살아라, 인생 기왕 풍찬노숙인 걸 그게 역사인 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잠에 빠졌다
김용락 시인 /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밀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날 바로 그날 밤
양철 지붕을 쉬지 안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 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김용락 시인 / 비 구경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10미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너머로 멀리 초록의 와룡산이 비바람에 전신을 맡겨 그 둔한 윤곽이 그림자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안방에 엎드려서 비디오를 보고 있는 다섯살배기 딸애를 일으켜 안고 비님이 무섭게 오시네 비 구경하자며 베란다 난간에 붙어섰다 공터 풀밭에 살고 있는 메뚜기가 이 빗속에 무사할까 개미 집에 물이 들어가지나 않을까 빗줄기를 타고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지나 살펴보자는 말들을 딸애 귓속으로 불어넣기 위해 나대로 안간힘을 썼다. 잠시 안겨 있던 아이가 무참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아빠 이제 그만 들어가자 슈퍼마리오 다 끝났겠다"
김용락 시인 / 귀향자의 노래
절기도 입동이 지나갔다 들판의 벼낟가리는 어디론지 실려가 흔적이 없고 그 자리에 빈 그루터기만 남아 올 가을의 상채기 같은 추곡 수매가격을 달래고 있다 우리들은 비교적 볕이 잘 드는 사랑채 뜰 앞에다 헌 가마니때기를 깔고 넓적한 궁뎅이를 마주대고 앉아 이 늦가을에 파종해야 할 씨마늘의 쪽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제 정신과 몸뚱이를 얼지 않게 잘 갈무리하여 새봄이 오면 파릇파릇 곧은 뜻으로 진실되게 돋아나는 조선 토종씨마늘만을 골라 쪼개서 그 중에서도 낟알이 굵고 실한 놈은 이쪽으로 좀 못한 놈은 저쪽으로 모으고 아주 쓸모없는 것들은 돼지 구정물통에 미련없이 던져버린다 이렇듯 마늘쪽 나누기에 열중하다가 나는 문득 맞은편에 앉아 여축없이 실한 놈만 골라내는 습관 같은 아버지의 손놀림을 바라보면서 만약에 우리들도 저렇게 등위를 나누게 된다면 나의 전부는 어디로 가서 처박히는 것일까 문중답 서너 마지기마저 남몰래 팔아서 대학 학비 대느라 피땀흘린 아버지의 뜻과는 너무나 다르게 판검사 고급 공무원은 그림자도 못 밟아보고 개똥은 약에라도 쓸 수 있다는데 개똥보다 형편없어 아무데도 쓸 수 없는 시 나부랭이나 끌쩍이는 나의 이 미련함은 돼지 구정물 속에라도 던져질 수 있을까 화해할 수 없는 삶은 갈수록 깊어지는데 이 늦가을 어느 날에 씨마늘쪽을 나누면서 참으로 쓸쓸하고 쓸쓸하게 불러보는 처연한 귀향자의 노래여
-시집 <푸른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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