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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숙 시인 / 오늘의 기쁨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이 기쁨이고 창밖을 내다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기에 기쁩니다. 세월이 나를 속이더라도 역겨운 삶이 힘들어도 하늘에 잿빛구름이 가득할지라도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이 있어기쁩니다. 이른 아침 새들의 정겨운 소리 스산한 바람이 가슴 한 구석에 스며들어도 존재하는 정체성 하나만이라도 나의 기쁨입니다. 인명의 끈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만들고 갈고 닦아야 합니다.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너무나 큰 행복을 찾는 사람은 작은 행복을 비켜갑니다. 오늘의 기쁨도 모르고,
김연숙 시인 / 벽돌공 남자
파벽돌을 색깔 맞춰 재미있게 쌓다보니 문을 만들지 않았군 깜깜한 집 안에는 눈 먼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벽돌공 남자도 갇혀 버렸지 그는 어둠 속에 그냥 서 있어 삐약삐약
직선과 균형을 유지하는 이 세상 모든 집들이 얼마나 몸을 틀며 지루해 하는지 자정 지나고 한 무리 양떼들이 몰려왔다 사라진 후 뚝, 뚝, 철골들 관절 비트는 소리
울타리 속 난간에 놓인 화분들
뭉게구름 같은, 둥글고 뾰족한 제 각각의 생각덩이를 이고 나무들은 그냥 서 있지 저 무성한 생각덩이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으면서 이고만 있네 살랑살랑, 바람도 불지 않는데
제 갈 길 가는 사람 열심히 가보라지 아직도 깜깜한 벽돌집 안에는 뾰족지붕 꼭대기에 마지막 벽돌을 어떻게 올려놓을까 벽돌 하나를 손에 들고 고개를 쳐든 채 궁리하며 서 있는 벽돌공 남자
-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 2015
김연숙 시인 / 당신은 꽝입니다
그 여자 태어났을 때 온 식구 허탈해서 누워버렸죠 꽝 뽑았다고, 딸이었다고 빈 동그라미 안에서 꽝 아기 쌔근쌔근 자고 있었죠
다섯 살 무렵부터 온몸으로 태가 흐르더라는 아주 일품이라는 그렇고 그런 얘기들 아홉 살 때 얻어 읽은 폭풍의 언덕 귓가에 먹먹한 그 폭풍에 사로잡혀 속편을 쓰고 또 쓰고 끝내, 그 여자의 연애는 꽝이었다죠
전생을 보고 머리 위의 후광도 볼 수 있다던 웬 도인이 말했었대요 당신의 오라는 흰빛이군요
꽝은 당연히 흰빛 지금 그 여자 머리 위를 한번 보세요
눈부신 꽝입니다
-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 2015
김연숙 시인 / 시인의 눈
나와 세상이 마주보는 접점에 투명한 유리알 놓여 있네 태어날 때 세상에 갖고 나온 것 대물렌즈 접안렌즈 모두 다 아닌 바로 그, 맑으면서 맹점도 있는
굶주린 거울처럼 모든 것을 담아도 늘 비어있는 이상한 그것 모든 기억이 잠겨있는 담수호랄까
선회하며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도 될 수록, 혼절하지 않으려는 팽팽하고 야릇한 그것 이 세상에 특파된 종군기자라네 사령장도 없는데
태어나던 날, 그 방의 전등 불빛을 기억하고 있다는 귄터그라스를 아는가
김연숙 시인 / 나일 강가의 시간
나는 이방인이었다 저녁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었다
큰 나무 가득히 열매처럼 전등알이 환하고 강을 건너 불어오는 밤바람은 선선하다 하얀 꽃을 무명실로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소년들이 팔고 다닌다 생애 가장 로맨틱한 선물을 동전 몇 개로 건네주고 목에 걸고 열대의 꽃은 향기롭다 누군가 탕, 탕, 산탄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나일의 밤 속으로 야광새들은 낙하한다 슈팅클럽 왈리마, 바람 부는 강가에서 밤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 물담배를 피우는 콧수염의 남자들
한 밤이 익어가고 있었다 과일향기 내뿜으며 발효하고 있었다 나일의 밤 속으로 낙하하던 야광의 새들처럼 어둠 속의 외눈으로 누군가 명중시킨 내 시간의 표적들 언제나 서성대던 이방인의 심장 위에 하얀 꽃들 황홀하게 시들어 가던
먼 먼 강가의 그때
김연숙 시인 / 쓴다 먼지 위에 쓴다 손가락을 담근 물의 속살에 쓴다 진흙 위에 쓴다 성에 위에 쓴다 반짝이는 청동거울 한가운데 쓴다 모래 폭풍에 휩쓸려가는 글자들 버스를 타고 소풍 갈 때 앞에 앉은 아이가 창밖으로 놓친 모자를 뒷자리의 아이가 잡아챘던 것처럼 클릭, 하지 않으면 꼬리를 보이며 사라져가는 글자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도 꽁꽁 접은 종이쪽을 박아넣고 있다 웅얼웅얼 돌아서서 기도하는 오래된 돌벽 틈새로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2015
김연숙 시인 / 잡념은 울창하다
투명한 젤리 속을 밀어나가듯 무겁게 헤쳐가는 소리들의 숲
쉬지 않고 연주하는 전속 악단 거느리고 지금은 슈퍼마켓 가는 길 풀릴 듯, 풀릴 듯, 이어지는 무궁동(無窮動)의 카덴차 텅 빈 시간의 깡통들이 매달려간다
은행까지 전철까지 꿈속에까지 빙빙 감싸 몰고 다니는 제 운명의 비닐막
장엄한 불협화음 속으로 유령처럼 꿈처럼 정오의 거리를 걸어가는 저, 유리 미궁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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