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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숙 시인 / 오늘의 기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7.
김연숙 시인 / 오늘의 기쁨

김연숙 시인 / 오늘의 기쁨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이 기쁨이고

창밖을 내다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기에 기쁩니다.

세월이 나를 속이더라도

역겨운 삶이 힘들어도

하늘에 잿빛구름이 가득할지라도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이 있어기쁩니다.

이른 아침 새들의 정겨운 소리

스산한 바람이 가슴 한 구석에

스며들어도

존재하는 정체성 하나만이라도

나의 기쁨입니다.

인명의 끈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만들고 갈고

닦아야 합니다.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너무나 큰 행복을 찾는 사람은

작은 행복을 비켜갑니다.

오늘의 기쁨도 모르고,

 


 

김연숙 시인 / 벽돌공 남자

 

 

파벽돌을 색깔 맞춰 재미있게 쌓다보니

문을 만들지 않았군

깜깜한 집 안에는 눈 먼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벽돌공 남자도 갇혀 버렸지

그는 어둠 속에 그냥 서 있어 삐약삐약

 

직선과 균형을 유지하는 이 세상 모든 집들이

얼마나 몸을 틀며 지루해 하는지

자정 지나고 한 무리 양떼들이 몰려왔다 사라진 후

뚝, 뚝, 철골들 관절 비트는 소리

 

울타리 속

난간에 놓인 화분들

 

뭉게구름 같은, 둥글고 뾰족한 제 각각의 생각덩이를 이고

나무들은 그냥 서 있지

저 무성한 생각덩이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으면서 이고만 있네

살랑살랑, 바람도 불지 않는데

 

제 갈 길 가는 사람 열심히 가보라지

아직도 깜깜한 벽돌집 안에는

뾰족지붕 꼭대기에 마지막 벽돌을 어떻게 올려놓을까

벽돌 하나를 손에 들고 고개를 쳐든 채

궁리하며 서 있는 벽돌공 남자

 

-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 2015

 

 


 

 

김연숙 시인 / 당신은 꽝입니다

 

 

그 여자 태어났을 때

온 식구 허탈해서 누워버렸죠

꽝 뽑았다고, 딸이었다고

빈 동그라미 안에서

꽝 아기 쌔근쌔근 자고 있었죠

 

다섯 살 무렵부터

온몸으로 태가 흐르더라는

아주 일품이라는 그렇고 그런 얘기들

아홉 살 때 얻어 읽은 폭풍의 언덕

귓가에 먹먹한 그 폭풍에 사로잡혀

속편을 쓰고 또 쓰고

끝내, 그 여자의 연애는 꽝이었다죠

 

전생을 보고

머리 위의 후광도 볼 수 있다던

웬 도인이 말했었대요

당신의 오라는 흰빛이군요

 

꽝은 당연히 흰빛

지금 그 여자 머리 위를 한번 보세요

 

눈부신 꽝입니다

 

-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 2015

 

 


 

 

김연숙 시인 / 시인의 눈

 

 

나와 세상이 마주보는 접점에

투명한 유리알 놓여 있네

태어날 때 세상에 갖고 나온 것

대물렌즈 접안렌즈 모두 다 아닌

바로 그, 맑으면서

맹점도 있는

 

굶주린 거울처럼 모든 것을 담아도

늘 비어있는 이상한 그것

모든 기억이 잠겨있는

담수호랄까

 

선회하며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도

될 수록, 혼절하지 않으려는

팽팽하고 야릇한 그것

이 세상에 특파된 종군기자라네

사령장도 없는데

 

태어나던 날, 그 방의

전등 불빛을 기억하고 있다는

귄터그라스를 아는가

 

 


 

 

김연숙 시인 / 나일 강가의 시간

 

 

나는 이방인이었다

저녁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었다

 

큰 나무 가득히 열매처럼 전등알이 환하고

강을 건너 불어오는 밤바람은 선선하다

하얀 꽃을 무명실로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소년들이 팔고 다닌다

생애 가장 로맨틱한 선물을 동전 몇 개로

건네주고 목에 걸고 열대의 꽃은 향기롭다

누군가 탕, 탕, 산탄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나일의 밤 속으로 야광새들은 낙하한다

슈팅클럽 왈리마, 바람 부는 강가에서

밤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

물담배를 피우는 콧수염의 남자들

 

한 밤이 익어가고 있었다

과일향기 내뿜으며 발효하고 있었다

나일의 밤 속으로 낙하하던 야광의 새들처럼

어둠 속의 외눈으로 누군가 명중시킨

내 시간의 표적들

언제나 서성대던 이방인의 심장 위에

하얀 꽃들 황홀하게 시들어 가던

 

먼 먼 강가의 그때

 

 


 

 

김연숙 시인 / 쓴다

먼지 위에 쓴다

손가락을 담근 물의 속살에 쓴다

진흙 위에 쓴다 성에 위에 쓴다

반짝이는 청동거울 한가운데 쓴다

모래 폭풍에 휩쓸려가는 글자들

버스를 타고 소풍 갈 때

앞에 앉은 아이가 창밖으로 놓친 모자를

뒷자리의 아이가 잡아챘던 것처럼

클릭, 하지 않으면

꼬리를 보이며 사라져가는 글자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도

꽁꽁 접은 종이쪽을 박아넣고 있다

웅얼웅얼 돌아서서 기도하는

오래된 돌벽 틈새로

-시집 『눈부신 꽝』 문학동네, 2015

 

 


 

 

김연숙 시인 / 잡념은 울창하다

 

 

투명한 젤리 속을 밀어나가듯

무겁게 헤쳐가는 소리들의 숲

 

쉬지 않고 연주하는 전속 악단 거느리고

지금은 슈퍼마켓 가는 길

풀릴 듯, 풀릴 듯, 이어지는

무궁동(無窮動)의 카덴차

텅 빈 시간의 깡통들이 매달려간다

 

은행까지 전철까지 꿈속에까지

빙빙 감싸 몰고 다니는

제 운명의 비닐막

 

장엄한 불협화음 속으로

유령처럼 꿈처럼

정오의 거리를 걸어가는

저, 유리 미궁의 여왕

 

 


 

김연숙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2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눈부신 꽝』 『산수유 빛 그리움의 얼굴을 닦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