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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수덕 시인 / 바람의 탄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7.
양수덕 시인 / 바람의 탄생

양수덕 시인 / 바람의 탄생

 

 

덩그마니 남겨진 아버지의 모자와 구두

물컵에서는 줄곧 약 냄새가 풍겼다

빈자리가 소리 없이 부풀었던 몇 달

천의 바람이 불어왔다

허공에 숨소리 가득

죽은 사람이 천의 바람이 되어

산 사람을 위로한다는 노래 가사에 취해 어머니는

차즘 화색이 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까지 뒤집어 쓴 이불

을 단번에 벗겨 버렸다

바람이 된 아버지

어머니의 몸에 천의 귀를 달아준 바람의 스킨십은

부드럽지만은 않아 산 사람을 꾸짖고

어머니 화답하듯 예전처럼 거울을 보셨다

여름 시들 무렵 한달음에 달려온 태풍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붉은 입술을 지천으로 달아주자

어머니는 맞바람으로 섰다

몰아치는 천의 웃음소리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

 


양수덕 시인 / 맨드라미를 알기까지

 

 

엄마의 바코드를 읽어줄 사람이 없었어요

 

젊은 엄마가 목 부스럼 위에다 보라색 물약을 칠했어요

발라도 낫지 않는 엉터리였지요

 

그 물약 오래 덧칠하다가 바랜 자줏빛 엄마가 피어났어요

아주 까슬까슬한 그늘이었어요

 

빗줄기들이 슬픈 눈매로 때 가리지 않고 건너오고

 

어느 날 오글오글한 알들이 슬었어요

어찌 그리 용하게 알짜 토종인 여인을 찾아왔는지

이듬해 꽃을 흉내 내며 달려들었어요

다음 생까지 따라가려 틈을 보았지요

 

빗줄기들로 엄마의 바코드가 완성되었어요

누구와도 젖을 수 없는 비망록이었어요

 

엄마는 오래 견디며 시들어가다가 어느 때부터

맨드라미의 반달 눈웃음만 보여주기로 했어요

 

어느덧 다 해진 엄마가 허공에 들자

바코드가 까만 빗줄기들을 떼어내기 시작했어요

 

― 『자전거 바퀴』,상상인, 2023.

 

 


 

 

양수덕 시인 / 자장가를 쓰다듬다

 

 

보드라운 깃털로 싸인 밤에 안기면 숨소리조차 시끄러워 거친 숨 내려놓고 생각을 거두고 오직 잠으로 가는 여행에는 아픔이 없어 두려움이 없어 걸림이 없어 지저분한 내장 다 골라 버리면 잠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살을 얻지 목화솜 타고 오는 잠 자장 자장 자장……

 

살에서 삐져나온 뼈처럼 다른 밤으로 갈아타는 엄마 보드라운 깃털들 빠져 빨간 맨살 드러내며 엄마에게 이주 신고를 마친 밤 기침과 가래가 밤의 속삭임은 아니야 뒤척이는 잠이 밤의 묘약이 아니야 가면을 벗어 벗어봐 보드라운 깃털로 싸인 밤 자장 자장 자장……

 

― 『자전거 바퀴』,상상인, 2023.

 

 


 

 

양수덕 시인 / 발견

 

 

나는 의자가 없는 허공을 더듬네

 

작은 손의 커다란 기적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 손이 내 의자였다니

 

손이 손에게 매달릴 때마다

목숨 줄 이어가느라 힘이 들었을 어머니

다 낡은 의자의 신음을

나는 듣지 못하고

 

의자 아닌 의자의 그림자들만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

사라진 의자의 기억을

해 비치는 꽃병 속에 넣네

 

내 남은 생의 시들지 않는 꽃으로 모셔두어야 하는

어머니 손의 기억

 

이제 나는 의자 없이 서성거려야 하네

 

 


 

 

양수덕 시인 / 멀리 레몬 나무가 자란다

 

 

 가느다란 비가 질기게 발등을 묻었다

 너무 가늘어서 걸려 넘어지는 이가 없어

 

 그렇게 그녀 땅의 굳은살로 스며들었다 달아날 수 없었고 가슴까지 묻으니 비명이 새나가지 않았다

 

 젖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빛 한 올 엮이지 않는 곳은 추락의 기억이 눈망울을 홉뜨고

 

 학교는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닫힌 창문 같은 아이들이 덜컹덜컹 그녀의 꿇은 무릎 위에서 시소 놀이, 태풍의 눈을 단 학부모들의 혓바닥은 전원을 풀어놓은 잠자리까지 쳐들어왔다

 

 비의 살에 그녀의 속앓이 흘러 흘러서 비의 뼈에 갇힌 혼잣말

 

 비의 마지막 한 방울이 반짝, 학교를 쏟아버렸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폐허 모두의 미래는 숨이 죽고

 찢긴 종이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교실

 꽃이라 부르는 가면들 아름답게 얼굴 바꾸느라 손거울을 꺼냈다

 

 


 

 

양수덕 시인 / 약손

 

 

 홑청 베갯잇 테이블보 적삼...... 등등 엄마 앞에 줄줄이 섰다

 후줄근한 것들의 양식은 풀이었다

 

 심지가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지

 후줄근한 것들에게 공들여 풀을 먹여주던 엄마

 

 게걸스런 그들 입을 닦아주면서

 그대로 두면 곧 침몰할 배라고 가라앉는 혼들을 일으켜 세웠다

 

 바삭한 공기를 품은 요와 이불

 식구들의 끈끈한 땀이 잠자리에서 말라갔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오다 말다

 

 엄마 하늘로 간 날 낮달이 손을 감추었다

 

-시집 『자전거 바퀴』, 2023, 상상인

 

 


 

 

양수덕 시인 / 함초, 참 난해한

 

 

풀은 풀인데 소금밖에는 취할 것이 없어서

피를 토하고 너부러질 수 없어서

물오른 독마저 삼켜 버렸다

 

하늘로 달리는 가지들은

펄에 차린 핏줄기들의 군무

 

뼈를 태우는 소금 바람결에

두려운 시간을 받아치는, 녹아 한 덩이가 된

빨간 가지들은 온몸을 비틀어 하늘로 하늘로

 

이렇게도 사는데 살다 보니 춤도 되는데

춤의 종착역에 화려한 외출을 부르는

빨간 구두가 기다리는데

 

그녀가 골라 놓은 마지막 자리는

지층 맨 아래

흙 한 줌 떠 낼 수 없는 깊이

 

오는 사람 물리치며 십 년 공들인 우울 덩이

그녀에게 저 빨간 가지들은 이상한 놀음 아니면

한 줄도 읽혀지지 않는 시

 

-시집 『왜 빨간 사과를 버렸을까요』에서

 

 


 

양수덕 시인

성신여자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신발 신은 물고기』 『너무 많은 입』 『가벼운 집』 『유리 동물원』 『새, 블랙박스』 『엄마』. 산문집 『 나는 빈둥거리고 싶다』. 소설집 『그림쟁이 ㅂㅎ』, 동화 『동물원 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