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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덕 시인 / 바람의 탄생
덩그마니 남겨진 아버지의 모자와 구두 물컵에서는 줄곧 약 냄새가 풍겼다 빈자리가 소리 없이 부풀었던 몇 달 천의 바람이 불어왔다 허공에 숨소리 가득 죽은 사람이 천의 바람이 되어 산 사람을 위로한다는 노래 가사에 취해 어머니는 차즘 화색이 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까지 뒤집어 쓴 이불 을 단번에 벗겨 버렸다 바람이 된 아버지 어머니의 몸에 천의 귀를 달아준 바람의 스킨십은 부드럽지만은 않아 산 사람을 꾸짖고 어머니 화답하듯 예전처럼 거울을 보셨다 여름 시들 무렵 한달음에 달려온 태풍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붉은 입술을 지천으로 달아주자 어머니는 맞바람으로 섰다 몰아치는 천의 웃음소리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
양수덕 시인 / 맨드라미를 알기까지
엄마의 바코드를 읽어줄 사람이 없었어요
젊은 엄마가 목 부스럼 위에다 보라색 물약을 칠했어요 발라도 낫지 않는 엉터리였지요
그 물약 오래 덧칠하다가 바랜 자줏빛 엄마가 피어났어요 아주 까슬까슬한 그늘이었어요
빗줄기들이 슬픈 눈매로 때 가리지 않고 건너오고
어느 날 오글오글한 알들이 슬었어요 어찌 그리 용하게 알짜 토종인 여인을 찾아왔는지 이듬해 꽃을 흉내 내며 달려들었어요 다음 생까지 따라가려 틈을 보았지요
빗줄기들로 엄마의 바코드가 완성되었어요 누구와도 젖을 수 없는 비망록이었어요
엄마는 오래 견디며 시들어가다가 어느 때부터 맨드라미의 반달 눈웃음만 보여주기로 했어요
어느덧 다 해진 엄마가 허공에 들자 바코드가 까만 빗줄기들을 떼어내기 시작했어요
― 『자전거 바퀴』,상상인, 2023.
양수덕 시인 / 자장가를 쓰다듬다
보드라운 깃털로 싸인 밤에 안기면 숨소리조차 시끄러워 거친 숨 내려놓고 생각을 거두고 오직 잠으로 가는 여행에는 아픔이 없어 두려움이 없어 걸림이 없어 지저분한 내장 다 골라 버리면 잠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살을 얻지 목화솜 타고 오는 잠 자장 자장 자장……
살에서 삐져나온 뼈처럼 다른 밤으로 갈아타는 엄마 보드라운 깃털들 빠져 빨간 맨살 드러내며 엄마에게 이주 신고를 마친 밤 기침과 가래가 밤의 속삭임은 아니야 뒤척이는 잠이 밤의 묘약이 아니야 가면을 벗어 벗어봐 보드라운 깃털로 싸인 밤 자장 자장 자장……
― 『자전거 바퀴』,상상인, 2023.
양수덕 시인 / 발견
나는 의자가 없는 허공을 더듬네
작은 손의 커다란 기적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 손이 내 의자였다니
손이 손에게 매달릴 때마다 목숨 줄 이어가느라 힘이 들었을 어머니 다 낡은 의자의 신음을 나는 듣지 못하고
의자 아닌 의자의 그림자들만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 사라진 의자의 기억을 해 비치는 꽃병 속에 넣네
내 남은 생의 시들지 않는 꽃으로 모셔두어야 하는 어머니 손의 기억
이제 나는 의자 없이 서성거려야 하네
양수덕 시인 / 멀리 레몬 나무가 자란다
가느다란 비가 질기게 발등을 묻었다 너무 가늘어서 걸려 넘어지는 이가 없어
그렇게 그녀 땅의 굳은살로 스며들었다 달아날 수 없었고 가슴까지 묻으니 비명이 새나가지 않았다
젖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빛 한 올 엮이지 않는 곳은 추락의 기억이 눈망울을 홉뜨고
학교는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닫힌 창문 같은 아이들이 덜컹덜컹 그녀의 꿇은 무릎 위에서 시소 놀이, 태풍의 눈을 단 학부모들의 혓바닥은 전원을 풀어놓은 잠자리까지 쳐들어왔다
비의 살에 그녀의 속앓이 흘러 흘러서 비의 뼈에 갇힌 혼잣말
비의 마지막 한 방울이 반짝, 학교를 쏟아버렸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폐허 모두의 미래는 숨이 죽고 찢긴 종이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교실 꽃이라 부르는 가면들 아름답게 얼굴 바꾸느라 손거울을 꺼냈다
양수덕 시인 / 약손
홑청 베갯잇 테이블보 적삼...... 등등 엄마 앞에 줄줄이 섰다 후줄근한 것들의 양식은 풀이었다
심지가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지 후줄근한 것들에게 공들여 풀을 먹여주던 엄마
게걸스런 그들 입을 닦아주면서 그대로 두면 곧 침몰할 배라고 가라앉는 혼들을 일으켜 세웠다
바삭한 공기를 품은 요와 이불 식구들의 끈끈한 땀이 잠자리에서 말라갔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오다 말다
엄마 하늘로 간 날 낮달이 손을 감추었다
-시집 『자전거 바퀴』, 2023, 상상인
양수덕 시인 / 함초, 참 난해한
풀은 풀인데 소금밖에는 취할 것이 없어서 피를 토하고 너부러질 수 없어서 물오른 독마저 삼켜 버렸다
하늘로 달리는 가지들은 펄에 차린 핏줄기들의 군무
뼈를 태우는 소금 바람결에 두려운 시간을 받아치는, 녹아 한 덩이가 된 빨간 가지들은 온몸을 비틀어 하늘로 하늘로
이렇게도 사는데 살다 보니 춤도 되는데 춤의 종착역에 화려한 외출을 부르는 빨간 구두가 기다리는데
그녀가 골라 놓은 마지막 자리는 지층 맨 아래 흙 한 줌 떠 낼 수 없는 깊이
오는 사람 물리치며 십 년 공들인 우울 덩이 그녀에게 저 빨간 가지들은 이상한 놀음 아니면 한 줄도 읽혀지지 않는 시
-시집 『왜 빨간 사과를 버렸을까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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