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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인 / 거울을 보며
말씀은 처음에 섬으로 나타난다. 끝난 곳에서 뻗어나는 나무가지가 다음 말씀을 찾기까지의 그 동안이 여정이었다
거울은 하품을 한다. 뜻을 스스로 지워버리면 다시 날개가 되어 날아오른다.
가다가 좌초한 돛단배에서 기름이 새어 나오는 경우도 산들바람은 하늘의 산호밭에서 달을 가꾸고 있었다. 고병(古甁)의 포도잎 덩굴은 살랑거리지만 그림자는 잡히지 않는다.
섬 기슭에 우유빛이 퍼지는데 손은 시계를 멈춘다. 비가 가슴마다 다른 의미로 창마다 다른 자세로 내린다.
녹(綠)빛 귀를 기울이면 거울 안에서 피곤한 날개는 돌아온다. 이리하여 말씀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생겨난다.
김구용 시인 / 소리
참다운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보인다.
하늘이 보이는 유리창에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지러이 속삭이는 구름이었다.
밤을 기다려 등불 밑에서 글을 쓰며 미숙한 생각은 갈증에 못 견디어 하품을 씹는다. 비가 온다
나의 방을 들여다보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유리창 너머로 열매들이 익는 노래가 들린다
김구용 시인 / 희망
나는 죽었다. 또 하나의 나는 나를 조상弔喪하고 있었다. 눈물은 흘러서 호롱불이일곱 빛무 지개를 세웠다. 산호뿔 흰사슴이 그 다리 위로 와서 날개를 쓰러진 내 가슴에 펴며 구구구 울 었다. 나는 저만한 거리에서 또 하나의 이러한 나를 보고 있었다.
김구용 시인 / 풍미風味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김구용 시인 / 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계절마다 가지가지로 변하는 벽화는 없을 것이다. 전둥을 죽여도 해와 달과 별들이 창에 끓어올라 심심하지 않다. 당신이 날씨를 살피며 기다리던 사람이 오후의 길을 오는 것이 보이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느뇨. 암만하여도 나는 그 순수한 투명이 좋은가 보다. 아지랑이를 따라 꽃에서 꽃으로 날으는 나비의 기쁨도, 책상 너머 바깥에서 오랫동안 더위를 씻어 주던 녹음이 낙엽지는 고요도, 잘 익은 과실나무 아래서 생각하던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도, 다 그대로 전하여 주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둠을 차별하지 않기에 한 쌍의 제비가 단꿈 꾸는 그믐밤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유리창과 나를 분리할 수는 없다. 눈보라 칠 때 유리는 추위가 방 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건만 방 안의 나는 젊은 소경이 피리를 삐이삐이 불며 지나가는것을 무심히 듣는 나를 슬퍼한다. 그러나 유리창이 맑음을 잃고 추위에 복잡한 꽃무늬로 동결한 모양이 내 아름다운 슬픔의 형상임을 보기도 한다.
김구용 시인 / 회고(懷古)
맑고 푸른 가을 날 고려의 옛 도읍을 찾아드니 송악은 반기건만 산들바람은 적적도 하네
충성의 어린 피가 풍상을 겪어도 선죽교는 변함이 없건만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만월대는 잡초만 우거졌구나
박물관의 유물들에 황진이가 떠올라 해는 서산에 가깝고 집은 연기에 젖네
돌 하나, 나무 하나 모두가 다 회고(懷古)로다 오백년 왕조는 어디에 가고 바람만 전하는가
김구용 시인 / 심상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고 실체에 나타나는 하늘의 자유 이 괴로움을 그러한 진실로 씻어다오 신이 아닌 자아에 기도하는 가슴 속 종소리 벽은 벽으로 연하여 파괴 위에 핀 정신은 아름다운 별들이 운행하는 섭리의 유방이다 현실을 박탈하는 화력에 타오르며 흐르는 동양의 고혈이 침략의 잘못과 절망을 시정하는 광명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러한 자각은 잿더미가 된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본질을 순수한 자비로 구극하라 그것은 무형한 사랑으로 주연을 충만한 생명의 화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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