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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경 시인 / Ghost note (관악기에서 실제로 연주하지 않지만 마치 연주하듯이 소리가 들려오는 음)
열쇠공들의 단합으로 겨울은 열리지 않고 굳게 잠기 는데 시베리아에 녹색 눈이 내린 날이 있고 어디쯤 석탄 공장이 있는 곳에 검은 눈이 내리고 공백을 메우는 소리들 사람이 나오는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의 하루의 절반 사람은 그려지고 사람은 찍히고 소리 죽인다 사람의 그림과 사진을 찾아보는 사람의 한 달의 절반 소리 되짚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얼굴이 되는 얼굴의 목소리 여름이면 태풍의 이름을 짓기 위해 태풍위원회 회원 국들은 모이고 먼 나라에서는 외로움 장관이 임명되고 이 나라에서는 외로움이 장관이구나 허위로 남은 발가락들 있지도 않았으면서 묻어둔 길의 구근 걷지도 않았으므로
황혜경 시인 / see
나는 볼 수 없는 것 당신은 보고 있을 거예요
그쪽에서 꽃이 피고 있다고 하셨죠 못 본 꽃을 본 당신이 보여주세요
모르는 암흑이라서 당신 손을 잡아요 당신을 통해서 끝이라 쓰고 꽃이라 읽을 수 있어요 꽃이라 해도 끝이라 했던 내게 당신이 말을 할 차례니까요 당신이 본 것을 보여주세요
황혜경 시인 / 무마(撫摩) 12호
쓸모를 알고 도구를 사용할 때 열두 번째로 만나던 때 도구가 도구를 이해하고 도구화한다는 생각으로 끝을 닦거나 곁을 당기거나 속을 비비면 여름에 모직 외투를 입고 있다가 홀연히 여러 개 흘리고 걷다가 벗는 몸이 있었고 시원해졌다 시원하다 여름은
겨울에 벗은 나무들 덮어주고 잎을 모아 말려 입으면 따뜻해졌다 따뜻하다 겨울은
그룹별 수업을 하는 동안 알던 새가 날아와 전하려 들고 무섭게 밧줄에 매달려 있던 것이 비로소 떨어져 나간 날 당연히 어디선가 무겁게 매달려 있던 아침이 내일은 없었다
전등의 속내가 빛이듯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등나무 아래 앉아 있고 모양이 얼핏 그림자를 보여주려고 했으나 다 덮어 지우는 그림
맨 먼저 문지르는 손들
작정하면 수고롭지 않았다
상처 난 곳조차 없었던 것처럼 하지 않고 가지 않고 행하지 않고 흔들리며 어루만지는 리듬으로 어물어물 어르고 달래고
사라지려는 스크래치투성이 열두 번째 그림
황혜경 시인 / 겨를의 미들
갑자기 왜 그래?라고 했니 갑자기는 아니야 어디서부터 얼마 동안 준비해야 갑자기가 아니지? 어중간한 네가 그동안 그걸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야 겨를이 없는 건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한가운데에서도 친구가 맞는 걸까 거기 끝에 누가 있다고 믿어서 여기서부터 누가 또 간다 있을 무엇 때문에 있는 무엇이 움직이려고 해본다 쪽을 지으려고 비녀를 꽂는 뒤의 그날의 미들
내가 좋아하는 그동안의 내 얼굴이 있지 자기가 좋아하는 그동안의 자기 얼굴이 있어 내가 좋아하는 자기의 미들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내 얼굴의 중앙 말고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고 돌아온 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있게 하도록 인정하게 하는 겨를의 의미들 완전한 거짓말도 되지 못하고 완전한 말도 되지 못하는 하지 못하는 나는 장난감 병원에 맡긴 망가진 장난감을 장난감 박사님들이 고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느슨해진 중간의 나사를 조이고 있다고
그러는 동안의 중심에서
아주 천천히 밥을 먹고 아주 천천히 몸을 씻고 아주 천천히 옷을 입고
-시집 <겨를의 미들>에서
황혜경 시인 / 문제적 화자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열심히 하는 중이라서 털을 곤두세운 래빗 헝클어져도 잠들어 있는 내 빗
느리게 가는 것은 거북이지 딱, 버티고 서서 가지 않는 거북스레
두 해에 초 하나는 안 될까 그런 셈으로는 열아홉 후한 거래상을 만나면 네 해에 한 개도 가능할지 몰라
나는 홈-스쿨인데 매일의 해답을 필요로 하는 물음인데 뒷걸음치면서 오늘 흐지부지 문제를 덮어버리고 가면 내일 소식불통인데 잘근잘근 나를 분할하는 물음들과 유사한 경험들 나만의 것이 아니겠지
화자의 콧구멍에 혀를 밀어 넣으려는 문제 많은 사람이 둘 있었다 사랑이라고 했다 그곳은 화자의 영역, 그렇게 침범하는 건 아니지 숨을 쉬려고 입을 열었으나 말하는 화자는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궁둥이를 가진 화자가 열매를 믿던 어느 날 날쌔게 석류알을 한줌 훔쳐 입에 털어 넣고 뛰던 일도 있었지만 열매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건 중대한 화자의 문제, 내다 버린 언니의 사체가 다 식을 때까지 읽히지 않는 메뉴판을 펴놓고 앉아 있던 고집도 문제, 꽃이 되고 싶다던 언니에게 화자는 문제, 거추장스러운 청각을 주렁주렁 달고도 듣지 않는 화자를 언니는 묵인했지만 그건 궁극적으로 화자의 문제였지 과거이긴 하지만 우는 아이를 자루에 담아 남의 집 대문 앞에 두고 사라지는 화자의 엄마들처럼, 화자가 소실(消失)의 미덕을 일찍 알고 있던 것도 문제라고들 해 벗어 둔 허물을 그리워하다 또 껴입고 가는 게 문제라고, 화자가 잃어버린 가방은 주인에게 소용없듯 누군가는 발견하겠지
빨간 칸나를 먹으면 빨간 똥을 누는 달팽이 얼음에 박혀서 맴돌지 않는 달과 팽이, 나의 속성 달에서는 체중이 6분의 1이라는데 무거운 내가 문제라는데 친족들이 몰표를 주고 논의해야 할 사항들이라고 하지만 강아지는 내 문제의 친구이고 문제를 이해할 때까지 답을 구하고 있을 테지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니까 참자 평균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니까 공식은 없으므로 나는 손들고 섰고 문들아, 머리 들라, 찬송하는 하얗게 굳은 화자의 석고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문제적 화자 때문인가
위 아래로 쏟으며 냄새를 맡으면서 화자가 언니 손을 잡고 가고 싶었던 곳은 누드주의자 마을인지도 몰라 늦게 벗는 인간이라 문제라고 합디다만 원래 늦되는 아이라 다루기 힘들었다고 합디다만 없는 주제에 눈동자를 굴리며 침묵을 지키면 창조적인 인간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합디다만 코코코, 문제의 납작코를 더 두드리는 화자는 참 나쁜 손가락이었다고 합디다만
학교에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이 나무그늘학교로 모여듭니다 한 자리 비워 둡니다 작은 의자에, 이제는, 나를, 앉힐 수도 있는데,
꽃씨 있습니다 화자를 위해 언니가 나눠드립니다
황혜경 시인 / 전前
23년 된 화분 12년 된 그릇 숲과 밥이 나무와 사람의 목록을 받아 적어가고 있을 때 보관된 것들이 몰래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감은 눈과 뜬 눈, 이 깜빡임 속에서 뒤에서 그네를 밀어주던 손들 큰 두부는 쉰다 쉰 두부와 미덥지 못한 냉장 시간의 일시적인 제빙과 사라지는 소름 측은한 인사가 곱다면 인사의 기원부터 읽기로 하자 그늘진 얼굴 눌어붙은 무지개 앙상한 발목에 매달린 걸음 모든 음영이 곱다면 음영의 세부를 묘사해 보자 풀어헤치기로 하면 표정이 생기는 윤곽
황혜경 시인 / A day in the Life
집에 없는 것처럼 숨죽여 살면 비누도 딱딱 그릇도 담지 않고 갇힌 것도 아닌데 가둔 것도 아닌데 관리하는 것의 소리가 압도적인 날이 있다 없어진 나는 소란의 주범이었다고 뜨겁게 애태우고 있던 것에 치우친 고장 난 견본이라고 사람의 시간으로 개와 산 게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개를 보내고 개의 시간으로 산다 데리고 5월의 장미가 거느리고 10월의 단풍이 거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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